⎯ “본질에 관한 탐구” (3)

본질essence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고전적인 명구를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근대 철학이 (특히, 데카르트가) 자아를 정의할 때 말한 바 있는 “내용을 담는 내용 없는 텅 빈 그릇”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탐구할 본질의 정의는 전자의 것이다.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시야에 우선적으로 들어오는 것들부터 생각해보자. 의자, 책상, 필통, 노트북 따위의 것들 말이다. 우리는 이들을 도구-사물이라는 범주에 소박하게 귀속시킬 수 있다. 이러한 도구들을 그러한 도구들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플라톤이 이미 던진 바 있고, 그는 꽤나 명쾌한 해답을 들려준다. 인간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무언가를 제작함, 즉 테크네Techne라는 것이다. 도구의 본질은 테크네이다. 더 정확하게는, 테크네가 도구를 도구로서 ‘존재’하게 만든다. 도구는 인간이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바 바로 그 목적이 아니라면, 도구가 아니다.

뒤샹의 <샘>은 이에 대한 소박하지만 확실한 직관을 제공한다. 뒤샹이 화장실에서 떼어낸 소변기는 더 이상 소변기가 아니다. 그것은 뒤샹이 기획한 맥락에 배치되면서 하나의 “예술작품” 으로서 기능한다. 그것의 도구됨, 즉 소변기를 그것이게끔 하는 테크네는 사라지고 새로운 맥락이 (이전까지는 소변기라고 불리운) 그것을 예술작품으로서의 어떤 것으로 만든다. 테크네 자체가 소변기에서 사라졌다고 말하든, 예술작품으로서의 테크네가 새롭게 기능한다고 말하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소변기가 담지한 속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으면서 소변기의 본질(테크네)만이 변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문제는 좀 더 복잡해진다. 우리는 도구의 본질에 대해 물으면서 그것의 본질이 테크네라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그런데 도구라는 것은 그것의 물리적 속성은 변치 않더라도 그 사용목적에 따라 전혀 다른 소여를 갖는다. 이른바 가변적 본질을 지닌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도구적 본질의 이러한 모순을 존재자 전체에 대한 이해로 끌고 들어간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이 지점이 포스트 모던 철학과 영미 철학 일반의 주요한 차이들을 구성하는 것 같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인간은 단순히 도구를 볼 때만이 아니라 자아, 타인, 개념, 공동체 등 자신이 마주하는 존재자 일반을 특정한 사용목적 (그의 표현에 따르면, 도구전체성)에 따라 인식한다. 이러한 사용목적은 무수한 맥락들로 구성된 다질적인 해석체계이며, 개별 주체마다 상이한 해석체계를 지닌다. 요컨대, 한 사물의 본질은 필연적으로 해석자마다 그 사태내용을 달리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그 사물의 물리적 속성과는 독립적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해석자의 해석 권역에 들어오지 않은 사물은 해석될 수 없으며, 따라서 무의미하다. (=의미 있는 발언을 할 수 없다)

“그것을 그것답게 하는 바로 그것”에 대한 물음은 테크네, 즉 “해석자의 해석체계에 따라 상이하게 드러나는 사태내용” 이라는 의미심장한 대답만을 남겼다. 일단 우리는 본질essentia이 우리의 상식적 이해와는 다르게 “이미 그것이 무엇으로서 현실화되어 나타남, 즉 현실태의 양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이른바 “가변적 본질”에 대한 해석을 여기서 잠시 제쳐두고, 본질과는 일견 상관없어 보이는 고전적 담론을 잠시 진행해보자.

여기서는 가능태-현실태 간의, 실제-실재 간의 대립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 대립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칸트의 “백 탈러 논변”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1) 실존하는 백 탈러와 상상된 백 탈러는 어떠한 내용적 차이도 갖지 않는다. 다시 말해, 둘은 동일한 속성을 지닌다.

(2) 그러나 상상된 백 탈러에서 그것의 실존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이는 공허한 동어반복이다.

 상기한 두 가지에서 우리는 어떤 사물의 실재existence가 그것의 실제reality, 즉 속성-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칸트의 논변의 핵심을 알아차릴 수 있다. 존재자의 본질 (여기서의 본질은 고전 철학에서의 본질, 즉 실제적 내용 혹은 속성이다) 은 그것의 실존과 무관하다. 둘 사이에는 어떤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그렇다면 칸트에게 실제와 실재의 유리는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가? 우리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의 비판 철학이 보여주는 성과들을 통해 이에 쉽게 답할 수 있다. 실재는 현상의 지평이다. 여기에는 지각이 최종 심급으로서 자리한다. 지각의 권역에 들어오지 않는 어떠한 판단들도, 그것이 논리학의 기본적 규칙들을 지킨다고 해도 ‘지식’이 될 수는 없다. 요컨대, 실제적 내용은 그것이 비로소 ‘실재’ 해야만 학문의 탐구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하이데거의 본질 이해는 현실태의 양상과 관련된다고 말한 바 있다. 본질은 그것을 마주하는 해석자의 사용목적에 따라 이러저러하게 현실화된 사태내용이다. 이는 정확히 칸트의 비판 철학의 연장선에 있다. 칸트에게 현실태의 역할을 하는 현상은 잡다의 선험적 종합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도식에 의거해 도출된 단일한 형식의 꼴로 현상은 나타난다. 따라서 현상은 단일한 형식을 유지한다. 반면, 하이데거에게 본질은 다양하게 해석된, 그 자체로 다양한 사태내용들로 나타난다. 칸트와 하이데거는 실제(현실화되지 않은, 잠재적인 내용들)와 실재(현실화된 존재자들, 현상) 간의 구분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더 정확히는, 하이데거가 칸트에게 동의한다) 그러나 칸트는 선험적인 도식을 통해 현상의 단일성을 추구한 반면, 하이데거는 다양성이야말로 실제(혹은, 가능태)가 현실화되는 조건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인간은 애초에 각자의 세계에서 대상을 해석한다. 같은 대상에 대해서도 인간은 서로 다른 본질의 내용을 지니고, 그것은 기초-존재론적 원리이다.

 본질에 관한 물음의 초입에서 우리는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소박한 정의를 토대로 담론을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본질은 ‘본질적 속성’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의자를 의자로 인식하는 것은 그것의 무엇됨, 즉 ‘다리가 4개임’, ‘사람이 앉을 수 있음’ 등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철학의 문제제기는 본질을 그러한 속성들의 관계보다 훨씬 먼 곳까지 데려간다. 우리가 의자를 인식할 때, 상기한 의자의 자연적 속성들은 해석의 대상일 뿐이다. 여기서는 각 해석자가 의자를 대하는 해석 방식, 즉 “현존재 각자의 세계”가 우선한다. 의자의 자연적 속성들은 권리적으로 선행하는 세계에 던져지고 해석된다. 이렇게 해석된 속성들은 사태내용으로서, 본질로서 현존재의 세계에 다시금 봉사한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본질 이해를 전수받은 현대 철학의 흐름에서는 이른바 ‘본질적 속성’ 이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종종 억압적 기제로 지목되기도 한다. 그러나 포스트 모던 철학에서 고전적 본질의 위상이 완전히 꺾여버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본질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면서 하이데거에게 가능태로서의 내용들, 즉 자연적 존재자들 (어려운 말로, 즉자존재들)의 소여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능태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은 어떠한가? 포스트 모던 좌파 철학자들의 입장은? 해체적 본질은 결국 상대주의로의 귀결을 예고하지 않는가? 우리는 곧 만나볼 다음 글에서 가능태들이 해체적 본질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그러한 극복이 어떻게 고전적 본질 개념을 새롭게 가져오는지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이는 현대의 주요한 철학적 지형들을 형성하는 동인이기도 하다.

하니
marks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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