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상은 실패를 말한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동의한다. 우리의 말은 언제나 실패를 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듯, 그 실패를 거듭하는 애씀이 실패하는 우리들의 참 실체일지도 모르겠다.


라이문도 파니카는 그의 책 <종교간의 대화>에서 각자의 종교를 빛에 비유한다. 초록빛, 보랏빛, 빨간빛은 그 스스로는 백색광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빛 아래에 있는 우리는 우리가 처한 바로 그 빛을 중심으로만 세상을 본다. 신성과 관계하는 모습 일반이 그렇다. 개별화된 것으로만 대면할 수 있지만 결코 그것의 보편 자체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우리 종교 생활의 일반이다. (그런 일반을 만나는 것은 그렇다면 가능한가?)

사진에 취미를 두던 시절이 생각난다. 조리개값과 셔터스피드, 노출도 중요하지만 화이트밸런스 보정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일이다. 내가 찍고자 하는 풍경의 백색광보다 훨씬 따듯하거나 차갑게 화이트밸런스 값을 설정한다면 영 맘에 들지 않는 사진을 얻게 된다. 따스한 느낌은 차갑게 식고, 냉정은 답답함이 된다. 후보정을 하면 되는 것이지만, 이미 사진이 잘못 나왔음을 느낄 즈음엔 <그 날의 빛>이 어떠했는가를 이미 잊었던 적이 다반사였다.

하나의 종교 경험에서 여러 종교 각자가 경험하는 풍성함을 동시에 느끼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한 장의 사진이 차가움과 뜨거움의 인상을 동시에 줄 수는 없다. 하나의 빛이 녹색이면서 동시에 적색일 수는 없다. (색각이상자인 나에게 그것은 비록 유사한 색이지만, 나의 색 경험은 정상색각자의 색 경험과는 전혀 다른 것일 터이다.) 어쩌면 이것들 각자가 모두 하나씩의 실패일 것이다. 내가 속한 웨슬리안(오순절 교파를 웨슬리안이라고 하자면, 또한 ‘속했던’) 전통은 로마 가톨릭 전통이 갖는 전승의 풍성함을 담지 못한다. 내가 보는 개물들의 빛은, 그것이 흡수하는 것에 실패한 그런 빛의 색이다. 나의 사진은 여러 사람이 그 풍경을 보고 느꼈을 풍성한 경험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실패가 반대로 풍성함을 보장한다. 나와 그가 다른 경험을 한다. 우리와 그들이 하나의 하느님을 다르게 고백한다. 하나의 풍경을 다르게 본다. 한 특수한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 여러 방식의 때로는 모순된 설명들이 등장한다. 이 불일치에도 불구하고—타자와 내가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고, 또 그 믿음이 타자를 대면하는 순간 앎이, 사실이 된다. 그 “공유하는 무엇”이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의 형태를 만든다. 그것의 색깔들로부터 나는 백색광이 여러 파장의 빛이 혼합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나의 실패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정말로 그것은 많은 경우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 실패가 누적된다. 누적되며 실패들 사이의 차이가 드러나고 또 같음이 드러난다. 오로지 차이만이 있는 실패들 가운데에도 우리는 그 실패한 것들이 어떤 공통된 곳을 향해 있다거나, 같은 재료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이 발견의 순간에서 실패는 풍성함을 창발해 낸다.

어쩌면 차라리 있는 것은 그 실패들 뿐이다. 단현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있는 것은 차라리 공적인 신체들 뿐이다. 그러나 그 실패들 가운데에서, 그리고 그 공적인 신체들 가운데에서, 다시 말해 그것을 보편화하는 그 말들 속에서, 참된 무언가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참된 것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종류의 믿음을 얻는다. 실패를 거듭 한다는 것. 그 실패 속에서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 믿음에 있다.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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