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후기이면서 동시에 복기이다. 나는 여기에서 4월 특집으로 게재한 <복제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윤리>에 대한 재검토,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다시 말하기”를 해 낼 것이다. 왜 나는 나의 생각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말하려 하는가? 여러 언어를 통해 쓰인 병렬적인 텍스트들이 동시에 한 곳을 향하고 있다면, 그 모든 텍스트들은 신뢰 가능한 기반을 넓히게 되리라는 소박한 기대 때문이다. 파상은 그 텍스트들이 향하는 바로 그 지점에 각각의 텍스트들이 도달하지 못하리라고 주장할 것이다. 즉 그는 “실패”를 말한다. 그럼에도 실패한 사례들이 무수히 많아진다면 그것은 또다른 규칙이 되는 법이다. 반드시 규칙을 만드는 것이 규칙일 필요는 없다.


다시 쓰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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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장을 다시 쓰도록 하자. 주장의 핵심은 변함이 없다. 어떤 윤리적인 행위는 상대를 고유한 무엇으로 포착할 때 시작된다. 그런데 그 고유한 것으로 포착된다는 것은 그를 오로지 보편화된 형태로서가 아니라, 보편화되지 않은 어떤 으로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 행태에서 이 포착은 ‘이름짓기 관행’으로 가장 잘 드러난다. 제션은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이고 비상관적으로 식별하는 기술구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의 개별성과, 한 마리 강아지나 한 마리 고양이를 넘어 있는 그들의 가치를 표시하기 위해 우리의 강아지와 고양이들을 이름짓는다.”

Jeshion 2009: 379

나는 이러한 중요성significance이라는 것이 그 대상에 대한 윤리적 태도와 구분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내가 보건대 어떤 것을 유의 깊게 보는 것은 그 대상을 윤리적으로 대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트롤리 문제에 대한 여러 변형들을 보자. 일단 가장 단순한 형태는 필리파 풋이 제시한 모델이다.

<기관차 사례>

그가 탈주하는 노면전차의 기사인데 그는 전차를 그 트랙에서 다른 트랙으로 조종하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하자. 다섯 남자가 [기차가 가게 되어 있는] 하나의, 한 명의 남자가 다른 트랙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기사]가 진입할 트랙에 있는 사람은 죽을 것이다.

Foot 1967

그리고 풋은 비슷한 사례로 환자를 살리기 위해 그의 약을 빼앗아야 하는 사례를 또한 검토한다. 이를 변형한 사례가 톰슨의 다음 모델이다.

<장기탈취 사례>

당신에게는 장기가 필요한 다섯 환자가 있다. 둘은 각각 폐가 하나씩 필요하고, 둘은 각각 한 신장이 필요하고, 다섯번째 환자는 심장이 필요하다. 만일 그들이 그 장기를 오늘 못 얻으면 그들은 모두 죽을 터이다. 만일 그들이 장기를 찾는다면, 당신은 그 장기를 이식하고 그들은 모두 살 터이다. 그러나 어디에서 폐, 신장, 심장을 찾을까?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즈음 어떤 보고서가 매년 정기검진을 하러 당신의 의원에 오는 한 청년이 꼭 맞는 혈액형을 가졌고, 매우 건강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Thomson 1985: 1396

두 사례는 일견 유사하다. 그러므로 어떤 한 사례의 답을 택하면, 다른 사례에서의 답도 결정되리라고 생각된다. 각 선택은 대표적인 윤리학계의 두 입장을 대변한다. 다섯 명을 죽게 두는 것은 의무론 모델에서 정당화된다. 의무론은 칸트의 주장에 따라 누군가를 오로지 수단으로 대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반면 한 명을 희생시키는 것은 결과주의 모델이 정당화할 수 있다. 공리주의로 대표되는 결과주의 윤리학에서는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손실이 가장 적은 경우를 고려하는 것이 윤리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윤리 준칙이 우리의 언어 생활 안에 있다고 쳐 보자. 그렇다면 많은 언어 사용자들이 고른 선택지가 우리의 윤리직관의 바탕이 무엇있지를 드러낼 것이다. 기관사 사례에서 많은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며, 그것은 장기탈취 사례에서의 선택과 같을까? 아이러니하게도, 통계 실험은 그렇지 않음을 보고한다. 강철에 따르면 기관차 사례에서는 120개 국가의 3만 명 이상의 피험자 중 89%가 한 명을 희생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했다(강철: 140에서 재인용). 반면 장기 탈취 사례에서는 85%의 피험자가 한 명을 죽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했다(강철: 141에서 재인용).

이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이 제안되었다. 예컨대, 두 사례는 <죽이는 것>과 <죽게 두는 것>의 차이로 인해 다른 윤리 직관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톰슨의 다음 사례를 또한 검토해 보자.

<뚱보 사례>


당신은 정신없이 트랙을 달려가는 전동차를 볼 수 있다. 당신을 그 전동차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기 위해 주위를 살피는데, 그곳에는 다섯 일꾼들이 트랙 위에, 육교 아래를 지나서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전동차 전문가로서, 당신은 정신나간 전동차를 멈출 확실한 방법을 안다: 정말로 무거운 중량을 그 행로에 떨구자. 하지만 어디에서 그런 것을 찾을까? 때마침 육교 위에 있는 당신 바로 옆에 서있는 뚱뚱한, 정말로 뚱뚱한 남자가 있다.

Thomson 1985: 1409

이 때 그 남자를 떨어트리는 것은 <죽이는 것>에, 떨어트리지 않는 것은 다섯 일꾼을 <죽게 두는 것>에 해당하므로 원론적으로는 기본형의 트롤리 문제와 같은 사례를 취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사례에 대해서는 78%가 남자를 떨어트려서는 안된다고 답했다(강철: 141에서 재인용).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사례를 티베트 승려들에게 물었을 때에는 그를 밀어서 다섯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 것이다(정진규/김신 2015: 520에서 재인용).

<ii>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가? 나는 나의 기존 입장을 반복하며 조심스럽게 주장한다. 그 차이는, 어떤 상대를, 고유한 대상으로 볼 수 있느냐의 태도에 관한, 차이이다. 그에게 장기가 있다고 함에 따라 우리는 <기관사 사례>의 희생자보다 <장기 탈취 사례>의 희생자를 더 생생한 이로 사고한다. 그 뚱뚱한 남자가 바로 우리 옆에 있다고 생각함에 따라 우리는 그를 수단으로 이용하기를 꺼려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트롤리 사례의 대상들을 개별화시키거나(즉, 가족이나 범죄자, 동물 등으로 대상 중 몇 가지를 변형하여 모든 대상이 일꾼인 경우를 만들지 않거나) 그 대상들을 완벽히 무작위로 배치하는 것을 상상할 경우에 기존의 트롤리 직관과는 다른 직관을 갖는다.

티베트 승려에게 특이한 결과에 대해서도 설명해 보자. 부득이하게도 여기에서는 의미이론을 다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크립키가 제안한 “괴델 실험”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한 바로 그 사람“이라는 기술구로 수학자 괴델이 알려져 있다고 하자. 그런데 사실 그 정리를 증명한 것은 괴델이 아니라 슈미트였다. 이 사실을 누군가가 알게 되었다. 이제 그 사람이 “괴델”이라는 이름으로 지시하는 것은 누구인가?

Kripke 1980으로부터

크립키(Kripke 1980)는 그의 직관에 따라 ‘괴델’은 여전히 그 괴델을 지시하며, 그러므로 고유명은 그것과 관련하는 한정기술구와 별개로 직접 그 대상을 인과적 연관에 따라 지시하는 “고정지시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Marchery et al.(2004)의 실험은 크립키의 직관이 오로지 서구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서구인들이 동아시아인보다 훨씬 인과[적 연관]에 기반한 판단을 할 것임이 주어질 때, 우리는 이렇게 예상한다. 크립키 식의 사고실험이 제안되었을 경우 서구인들은 아마도 훨씬 더 지시의 인과-역사적 해명에 맞추어 응답할 것인 반면, 동아시아인들은 아마도 훨씬 더 지시의 기술주구주의적 해명에 맞추어 응답할 것이다.”(B5)라고 가설을 세운다. 가설에 따른 실험 결과는, 크립키의 고유명 해명이 문화적 변인을 가지며 중국인들은 기술구주의자와 유사하게 고유명을 사용한다는 것이었다(B7).

이제 내 윤리적 직관과 이 실험 결과를 결합해 보자. 어쩌면 서구 문화는 뚱보 사례를 검토할 때, “the Fat man”을 피험자가 직접 보았다는 전제로부터 ‘the Fat man’을 일종의 특수한 대상으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반면 티벳 승려들은 ‘뚱뚱한 남자’를 오로지 기술구로 생각함에 따라 그에 대한 개별성을 인지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즉 두 답은 윤리 법칙의 문화적 다양성을 일러주었다기보다는 두 실험자집단이 애초에 다른 문제지를 가지고 문제에 답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내가 애초에 세웠던 가설을 유지하면서도 뚱보 사례의 상반되는 결과를 해명할 여지가 생긴다.

내가 내렸던 결론인 <어떤 대상의 개별성을 인지하는 것이 윤리적 행위 지침으로 주어질 수 있다>가 여기에서도 별안간 등장하고 말았다. 이 모델은 아직 투박하지만, 완전히 잘못된 방향에 놓이지는 않았다는 모호한 희망을 나는 갖고 있다.

<iii>

정진규가 트롤리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사뭇 새롭게 느껴진다. 덕윤리Virtue Ethics는 행위자가 아닌 행위 중심의 윤리학에 매몰된 기존 윤리학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사조로, 윤리적 행위를 위한 행위자의 유덕한 성품을 강조한다. 정진규(2016)는 덕윤리를 “다원론적 규범 윤리 이론”(442)의 한 예로 들며, 그것이 트롤리 문제에서 드러나는 일원론적 윤리 규범의 한계를 극복할 열쇠라고 말한다.

하지만 덕윤리는 “일원론적 윤리 규범”을 대체할 수 있는가? 오늘날의 사회에서, 특히 딜레마와 다양한 가치의 충돌이 난립하는 이 시대에 덕윤리는 사실상 행위지침력을 갖지 못할 것이라고 노영란(2003, 2012)은 주장한다. 분명히 윤리적 사고를 위해 어떤 덕의 요소가 삽입되는 것은 옳고, 그 점이 트롤리 사례(들)에 대한 우리의 직관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덕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떻든 우리는 윤리를 위한 보편화된 규범을 필요로 한다.

이미 덕윤리가 그 시작에서부터 지적했듯, 일원화된 규범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이제 덕은 그 규범을 보완하기 위한 규칙이 된다. 노영란(2012)과 황경식(2010)이 이와 같은 주장을 한다. 그 대상들을 고려하는 행위자로부터 독립되어 ‘그 행위 자체’를 생각할 때, 어떤 윤리적 판단에 따라 행동한 행위자의 실존적 고민은 무시되고 오로지 행위의 정당화 가능성만이 남는다.

이러한 윤리는 이론 상에서는 잘 구성될지 모르나 현실에서는 어떤 즐거움도 줄 수 없다. 트롤리 사례를 당신이 직접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차라리 우리는, 욥이 자신의 고통과 친구의 배신을 보며 절규했듯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다!”라고, “이 광경을 보지 못하도록 눈이 멀었어야 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 태도는 여러 규범 사이에 무엇이 우선인지를 비판할 때 방해를 만들기도 하지만, 행위자로 하여금 어떤 것이 윤리적 행위인지를 재고하게끔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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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론과 다원론의 사이에서: ‘덕’이라고 불리는 요소가 윤리적 실천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덕만으로는 윤리가 구성되기 어려워 보인다. 덕윤리가 다원론적인 규범이라는 것은 분명 일원론적 규범의 한계를 극복하는 장점이지만, 동시에 뚜렷한 하나의 윤리적 입장을 구성하지 못한다는 단점이기도 한 탓이다. 그래서 우리는 얼굴이 없는 이름들을 조합하며 더 나은 윤리적 방법을 고찰해 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개별화는 현실에서의 선택을 결정하고 일반화는 그 선택을 정당화한다. 일관되고 정돈된 도덕을 위해 우리는 보편적인 사례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의 적용을 위해, 그리고 그 규칙이 옳음을 배우기 위해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다. 아니, 그것을 떠올리지 않아서는 안된다. 우리의 태도는 대상의 얼굴을 지우는 데에서 출발해서 아주 구체적인 상대들의 얼굴로 향한다.

다시 쓰기 둘.

<1>

데이빗슨이 합리성에 관해 논하며 제기하는 다음 사례는 상당히 흥미롭다. 그는 노먼 말콤의 사고실험을 인용한다. 실험의 내용은 이렇다:

우리의 개가 이웃의 고양이를 쫓고 있다고 하자. 고양이는 오크나무로 향한 가파른 경사길을 달리지만,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방향을 틀고는 근처의 단풍나무 위로 사라진다. 개는 이 술책을 보지 못했고 오크나무에 다다르더니 뒷다리로 일어서고, 마치 측정하기라도 하듯 나무의 줄기를 긁고, 그리고 위의 가지들을 향해 흥분하여 짖는다. 창밖으로 이 모든 일을 관찰하는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저 개는 고양이가 오크나무 위로 올라갔다고 생각하는군.”

Norman Malcolm, Thoughtless Brutes: 13. Davidson 2018: 195-196으로부터 재인용

데이빗슨은 이 사례를 이렇게 평한다. 그는 우리가 이 개에게 어떤 믿음을 귀속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하지만 어떤 종류의 기술이 그 개에게 들어맞을까? 예를 들어, 그 개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그것이 나무라고 믿을 수 있을까?”라고 말하며 결국 개에게 특정한 사고, 믿음과 같은 것이 귀속될 수 없을 것임을 주장한다.

결국 어떤 대상을 언어적으로 의미화할 수 있을 가능성이 개에게 없기에 그는 믿음의 귀속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데이빗슨에게 믿음의 귀속 가능성은 사고 가능성을 함축하고, 사고의 구성은 합리성을 갖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러므로 언어 사용이 불가능한 개체는 합리성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오로지 언어사용을 하는 개체들만을 합리적 개체로 인정하는가? 또는 언어사용의 모든 주체에게 합리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가? 내가 지난 글에서 말하려던 것은 둘 중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언어사용은 하나의 기준에 불과하다. 또는, 합리성을 견고히 하는 충분조건에 그친다. 우리는 단지 그 대상과 나를 동일시함에 따라서도 그를 합리적 주체로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의적인 동일시가 가능한지에 대해 물을지도 모르겠다. 완벽한 자의성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동일시의 가능성이 제약된 한에서도, 필연적으로 인간, 또는 동물, 또는 생물 외의 어떤 대상에게도 동일시를 수행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억견이다. 인류는 자연 현상에 합리성을 투영했던 전례가 있고, 어떤 사건에 고유명을 붙인다거나 하나의 사건을 다른 사건의 주체로 여기는 관습을 갖고 있다.

데이빗슨은 그럼에도 합리성은 언어를 통한 것이어야만 한다고 할 것이다. 합리성의 소유 주체는 사회 내에 위치해야만 하는데, 사회 안으로 참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언어적 소통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러한 고찰의 결론은, 합리성은 사회적인 특성이라는 것이다. 오로지 의사소통만이 그 특성을 가진다.”(213)

그렇다. 데이빗슨의 주장이 옳다. 누군가가 합리성을 담지한다는 믿음은 의사소통 가능성, 그리고 나와 그가 같은 세계를 형성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명시적인 언어, 인간의 언어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들이 언어로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들을 언어적으로 이해하지 않는가? 그것의 표현이 인간언어에 따른 것인지의 여부와 내가 무엇을 인간언어에 따라 구조화하는지의 여부는 독립적이다. 내가 믿건대, 우리는 인간 언어의 방식이 아니고서도 소통을 하며 그런 종류의 언어, 구조화되지 않은 언어를 통해서 인간 외의 개체들에게도 특정한 방식의 공감을 할 수 있다.

물론 그 언어가 인간의 언어로부터 완벽히 독립적일 수는 없다. 우리는 어떤 사고틀에 따라서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비언어적 언어’라는 것은 그것과 연관된 기술과는 별개로 어떤 지위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사고틀이 깨지는 순간이 온다. 그것은 과학적 발견과 관련이 있으며, 시위 행위와 관련이 있다.

“직관”이라는 것이 오로지 우리의 심리적 활동을 포착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지과학적 근거를 들며 주장할 수 있고, 인간종이 신성으로부터 부여된 매우 특별한 성질의 독점자임을 진화를 근거로 반박할 수 있다. 사상사에서의 여성이 성공적 성과를 내고, 또 성공한 사례들을 제시함을 통해 여성이(또는 비남성이) 남성에 비해 열등한 지능을 가진다는 주장이 반박된다. 인간 외 동물들에게도 “고등한 사고 활동”이 가능하리라는 추측을 그들을 실험하며 얻을 수 있었다. 때로는 발견이 구조화된 언어를 부수고, 발견이 그 언어를 재구성한다.

<2>

크립키가 <명명과 필연성>에서 주장한 것을 생각해 보자. 그는 자연종Natural kinds에 관련되는 술어가 고정지시적 성격을 갖는다고 추측한다. 그는 이를 위해 금에 관한 사고실험을 한다. 우리가 단어 금이라는 단어를 <노란 금속>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 왔다고 해 보자.

그런데 어느날 “우리가 지금까지 쭉 금이라고 생각한 채 사용하던 그것”이 시각적 오류에 의해 노랗던 것이고, 실제로는 파란색임이 드러나고 말았다. 또는 본위화폐로 은행에 쌓여있던 그것들이 사실 금속의 성질을 갖고 있지 않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금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금의 새로운 성질이 드러났다”는 식으로 말할 것이다. 그래서 자연종은 고정지시된다.

왜 그럴까? 나는 그것이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대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에 존재하는 특정한 종들의 개체를 우리는 매우 직접적으로 관찰하고, 경험한다. <금속임>이나 <동물임> 등의 술어와는 달리, 그리고 <밝음>이나 <노란색임>과 같이 감각질(그런 것이 실재하는지의 여부는 잠시 미뤄두자)에 관련되는 술어와는 달리 자연종 술어에 대해서는 ‘~이란 대체 무엇인가?’의 질문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과학은 단지 그 개체들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어떤 종의 본성을 해명할 수 있다. 이 생각을 타당하게 하는 자연스러운 직관은, 자연종에 속하는 개체들이 실재한다는 것을 전제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경우에도 개념이나 기술 이전에 있는 실재하는 것들에 관해, 또는 “그것들”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3>

“비개념적 내용”이 인식에 수반될 수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기묘한가? 그러나 이를 옹호하는 이들이 있다. 예컨대 김한승(2009)는 지표적 내용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옹호하는 비개념적 내용이란 곧 “외부적 관점”과 “내부적 관점”의 횡단을 이루게끔 하는 근거이다(133).

어떤 이들은 (예컨대 이풍실 2011에 제시된 논거를 참조하자면) 우리의 개념 지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개념을 부여하기 위한 어떤 ‘다른 것’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비개념적 내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들이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전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그것은 단지 두 서로 다른 개념적 인식을 채택한 결과이다”라고 항변할 수 있으며 후자에 대해서는 “그럼에도 사고 불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을 대상이라고 부를 근거가 없다”라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비개념주의자들에게 얻을 통찰은 있다. 그것은 바로 “무언가 공적인 언어의 영역에 있지 않고서라도 우리의 언어적 인식에 영향을 주는 것들이 있을 것 같다”는 기묘한 추측이다. 왜 우리는 <내가 일어났다>라는 명제로부터, 또는 <A의 아들 이름이 ‘철수’이다>라는 명제로부터 관점의 차이를 얻는가? 관점의 횡단이 어떻게 자의적이지 않게 가능한가? 그것이 비개념적인 어떤 내용을 수반하기 때문이라고 김한승이 말한다.

개념주의가 맞다면 헤겔 식으로 모든 세계는 오로지 관념만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인가? 그런 세계가 있다는 주장이 정당화 가능한가? 이풍실은 그러한 질문들이 없이도 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우리는 인식의 내용이 모두 개념적일 뿐, 물리적 대상들은 개념적이지 않으면서도 개념적 내용을 위한 반성 대상으로 남는다고 말할 수 있다(이풍실 2011: 228 각주 39).

어떤 희망

명시적 언어 밖에서 작동하는 무언가가 있다. 아마도 이 또한 일종의 언어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도 있겠으므로 나는 그것을 여전히 언어라고 부른다. 또는, 비개념적인 언어라고 부른다. 벤야민이 “아우라”의 개념을 말할 때, 그리고 “언어 일반”을 이야기할 때 바로 이러한 언어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또 스피노자가 “속성”을 정의할 때 그러했을 것이며 비트겐슈타인이 “사태”를 통해 세계를 정의할 때 그러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런 언어가 있다. 또는, 언어 너머에 있으면서도 우리의 언어와 닮은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지각되지만 개념 틀 안에서는 포착되지 않은 채 획득된다. 어디에서 그런 것이 획득되는가? 아마도 세계를 인식할 때, 구조화되지 않았고 또 그러할 수 없는 대상을 조우함에 따라 그것이 획득된다. 모든 순간 우리는 어떤 고유한 것을 경험하며 아무리 정교한 언어가 구성되어도 이러한 만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타자가 등장한다.

다시 쓰기 셋.

윤리와 미학이 하나인가?

윤리적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무엇보다 윤리적인 평가는 단순히 취미적인 평가와는 구분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상대와 나의 평가가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허용되는 취미 판단과 달리, 윤리적인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보편화되어야 하는 당위를 내포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때로는 미적인 판단에 있어서도 당위가 내포되곤 한다. 예컨대, 누군가는 안드레 세라노의 <오줌 예수>(1987)(링크)을 보고 그것이 절대적으로 나쁜 작품이며, 예술로 평가되어서는 안된다는 완강한 입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차라리 윤리적 주장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이는 어떤 예술 행위에 있어, 또는 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 행위에 있어 바람직한 방향이 어떤 것인지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재적 절대성이 윤리의 보편성을 반박하는가?

어떤 이들은 윤리가 절대적인 맥락에서 주장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퍼트남이 <존재론 없는 윤리학>에서 견지한 입장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는 여러 공리 체계에 대한 믿음이 병렬적으로 있을 수 있다. 그 체계들 사이의 차이는 단지 어떤 것에 이름 붙이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때로는 어떤 종을 규정하거나 어떤 개념으로 가리키는 실체의 범위가 어디까지냐에 관한 차이에까지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그는 모든 존재론적 입장은 그렇게 견고한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이 비판은 단지 존재론뿐 아니라 윤리학적 입장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적용되어야만 한다.

나는 퍼트남의 주장의 뼈대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도 윤리적 명제가 절대적이지 않음을 결정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다. 퍼트남과 결을 같이 하는 비판들은 기껏해야 모든 윤리 체계가 규약에 의한 것임을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약이 있다. 그리고 그 규약으로부터, 규약을 사용하는 공동체 내에서 어떤 윤리적 명제들은 절대적 권위를 얻는다. 즉 윤리는 체계 외적으로는 상대적이며, 퍼트남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체계 안에서 윤리는 여전히 절대적이다. 또는 체계를 공유하는 이들에게 있어 보편화되어야 하는 규칙의 다발이다.

traffic lights with red light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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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규칙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데에 있다. 어떤 사례에서는 정말로 규칙이 대립한다. <법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살인은 부도덕하다>라는 명제가 잘 기능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누군가가 반드시 한 명의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면 어떻게 되는가? 어떤 경우에도 그는 준칙을 어길 수밖에 없다. 또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와 <무단횡단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명제가 잘 기능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런데 나는 약속을 지키려면 무단횡단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황과 판단들

헤어(2004/1981)은 ‘직관적 단계’와 ‘비판적 단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전자가 곧잘 그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윤리적 판단의 단계라면, 후자는 여러 중첩되는 판단 속에서 합리적 비판을 통해 최선책을 발견하는 단계이다. 헤어는 공리주의에 남으며 우리가 보편적인 시각에서 어떻게 한 행위를 비판하고, 무엇이 옳은 행위인지 밝힐지를 고민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는 것은 사후의 정당화나 탁상공론에서만 그럴듯하게 유용할 뿐이다. 우리는 매번 행위의 목록을 통해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시간, 그 장소, 그리고 나의 결단에 영향을 받는 그 사람(들)을 고려하며 실질적인 윤리적 비판을 수행한다. 예컨대, 약속을 지키는 것과 무단횡단을 하지 않는 것 사이에 모종의 위계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애국심이나 친구에 대한 애정으로 인해 둘 중 하나의 잘못된 선택을 한다.

준칙들이 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언어 차원에 있다. <F는 선하다>와 같은 틀을 가진 명제 꾸러미를 우리의 공동체는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준칙을 고려하게끔 하는 눈 앞의 사실들이 있다. 이 사실은 언어의 차원에 있지 않다.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것>을 주목하게 하고, <<바로 그것>은 윤리적 문제 상황이다>라는 판단을 하게 하는 충격적 상황이 있다. 그리고 그 상황이 놓인 맥락이 있다. 이 맥락만큼은 어떤 꾸러미 안에도 들어있지 않다.

어떤 결론?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을 하나로 정리할 수 있을까? 다시 쓰기 하나에서 나는 트롤리 모형에 대한 우리 직관을 일관되게 설명할 방법이 나의 추측과 연관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했다. 다시 쓰기 둘에서는 언어의 문제로 돌아가, 어떤 대상을 합리적 존재자로 여기는 것이 언어의 차원에서 규정된 바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다시 쓰기 셋에서는 언어와 윤리의 문제를 엮으며, 우리의 언어에는 윤리적 준칙들이 있으나 그럼에도 윤리적 판단은 언어적이지 않은 방식을 경유하여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나는 세 글이 공유하는 주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본다:

파상이 제기하는 문제는 결국 윤리의 문제와 긴밀히 이어진다. 윤리적 규범은 당췌 윤리적 실천을 잘 포섭할 수 있기나 한가? 규범은 언어 체계 안에 고정되어 있는 반면 그 규범에 관련된 우리의 실천은 유동적인 탓에 규범은 어느 정도 실천에 자유를 줄 수밖에 없다. 실천은 더 나아가 규범의 영역을 침해하기도 한다. 반복되어 나타나는 실천을 일반화해 규범화하는 것, 실천의 측면에서 불필요한 규범을 잊거나 거부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 그런 일들이 우리 곁에서 일어난다.

실천이 맥락상대적이라는 것이 규범이 맥락상대적이라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규범이 맥락상대적이라는 것은 전자를 함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규범”을 우리는 규범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유동적인 것과 고정적인 것. 이렇게 우리의 윤리적 실천에는 두 영역이 분리되어 있다. 발생적으로 그 둘은 서로 간에 간섭하지만, 우리는 그 둘을 실재적으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다

이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오로지 언어 안에 있지 않은 것, 오로지 공공성으로 포착되지 않은 것이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 밖에 무언가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어떤 실재가 있다. 그리고 그 실재가 규범을 참조하여 실재를 구성하고, 규범에 반항하여 새로운 규범을 창조하기도 한다.
이제 혹자가 묻는다. “그런 실재가 있기나 합니까?”
그렇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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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4 thoughts on “복제된 것들과 “그것들”의 윤리

    1. 안녕하세요, 지평 연구공동체 담당자 님 및 여정 님. 글을 읽고 느끼는 바가 커서 언어로 정언된 명제와 그간 충돌, 그리고 이와 다른 사례들을 통해 언어 밖 지평에 대한 물음을 제시하시는 과정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좋은 타래를 온라인에서 멀리서 읽게 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공유를 했습니다. 행여 위와 같은 행위가 불편하시다면 취소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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