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무해하지 못한 사람

왜 인간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길까. 그것도 그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에게. 마음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 그만큼 상처받을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라면, 인간은 그 어떤 존재보다도 서로에게 유해한 존재가 아닐까. 그리고 그 유해함이 저주와도 같은 인간의 운명이라면, 인간은 그 어떤 타인과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물론, 순전히 경제학적인 관점에서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쯤에서 다음 말들을 빌려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리 삶 속으로 스며드는 생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 존 버거

상처받는 걸 선택할 순 없지만, 누구로부터 상처받을진 선택할 수 있죠. 그리고 전 제 선택이 좋아요. 그 애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 조쉬 분 감독, <안녕, 헤이즐>

스스로의 내부로만 한없이 침잠하기엔 인간은 너무도 외로운 존재다. 사람에게 지독히 상처받고 다시는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다시 한 번, 이번이 마지막이라 믿으려 애쓰며 기대를 걸어 보게 되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그렇게 사람은 때로는 옅고 때로는 짙은 상흔을 남기며, 끊임없이 다른 누군가의 삶 속으로 스며들고 동시에 그 누군가가 자신의 삶에 스며들기를 허락하는 지난한 여정을, 스스로 선택한다.

마음을 열고 가까워진 사람들이 가장 소중한 상대에게 결국 상처를 남기는 이야기. 어쩌면 필연적인 아픔을 수반하는, 그러나 가까워지고 멀어지기까지의 시간이 너무도 따스하게 빛나기에 단지 아프다고만 말할 수는 없는 이야기. 소설집 『쇼코의 미소』과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 최은영은 그런 것들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인식은 단편 「일 년」에서 다시 한 번 선연하게 빛난다.

한 시간 남짓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서로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동안 그녀와 다희는 선후배도, 친구도, 애인도, 우연히 지나치는 사람도 아니었다. 자동차에서 내려 일터로 나가면 둘은 동료가 되었다가, 자동차에 올라타면 다시 서로의 이야기에 몰두하는, 알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 최은영, 「일 년」

최은영의 「일 년」은 한때 가장 내밀한 내부를 서로에게 드러내 보여주던 두 사람의 일 년을 그린다. 대졸 공채 전형으로 입사한 지 삼 년 차 사원인 지수와, 고졸 계약직 인턴인 다희는 나이와 성별만 같을 뿐 모든 면에서 다르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일 지수가 운전하는 차로 동행하며 서로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알 수 없는 사이’가 된다. 선배 사원에게 선뜻 꺼내기 어려운 어두운 이야기도 서슴지 않고 꺼내는 다희를 지수는 처음에는 경계하고 망설이면서도 점차 마음을 연다. 그리고 다희와 가까워지면서 지수는 자신이 사실은 얼마나 의미 있는 관계 맺기를 갈망해 왔었는지 서서히 깨닫게 된다.

다희와 이야기할 때면 따뜻한 바닷물에 들어가 수영하는 기분이 들었다. 몸에 부드럽게 감기는 물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다희와 만나고 그녀는 지금껏 그녀가 알았던 대화가 사실은 대부분 서로를 향한 독백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을 메우기 위해, 혹은 최소한의 사회적인 관계를 위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했던 말들이 어른이 되고 나서 그녀가 알던 대화의 전부였으니까. 그제야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자기 방에서 온전히 혼자가 되기를 바랐던 마음,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듣기 싫었던 마음 안에도 사람과 이야기 나누고 싶은 자신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 최은영, 「일 년 」

지수와 다희가 대화를 주고받는 차 안과 달리,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공허한 독백만이 떠돌다 흩어지는 회사는 그들에게 있어 살아남아야만 하는 정글과도 같은 공간이다. 대졸 출신인 지수는 고졸 특채로 입사한 동료들 사이에서 은근한 따돌림을 당하며, 반대로 고졸 인턴인 다희는 같은 인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라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열심히 노력해서 인정받고 안정적인 위치에 들어서고자 하는 그들의 평범하고도 간절한 소망은 그러나 무자비한 외부 세계에 의해 맥없이 좌절된다. 지수는 자신을 멀리하는 사람들을 혐오할 이유를 만들어낸 ‘스스로에게 벌을 주듯’ 폭음함으로써 무관심과 소외를 견디고, 나이가 많으니까 더욱 간절해져야 한다는 상무의 불편한 훈계를 참아내며 다희가 스스로와 서글프게 동일시하는 것은 내부로는 결코 진입할 수 없는 스노우볼 위를 끊임없이 기어가는 달팽이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들 누구에게도 그러한 고통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희는 커다란 기계가 주는 안도감이 있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기계는 감정이 없고, 그래서 기쁨도 슬픔도 불안도 느끼지 않고, 변덕을 부리지 않고, 누굴 속이지도 않고, 자기 모습을 감추거나 매번 변형시키지 않고서도 훼손되지 않는 단단한 존재라고, 그래서 발전기를 보고 있을 때면 알 수 없는 안도감 같은 것이 든다고 말했다.


– 최은영, 「일 년」

지수에게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도살 기계’로 생각되는 거대한 풍력발전기는 다희에게는 사뭇 다르게 비쳐진다. 이 말에는 그러나 아픈 구석이 있는데, 인간은 ‘감정이 없고, 그래서 기쁨도 슬픔도 불안도 느끼지 않고, 변덕을 부리지 않고, 누굴 속이지도 않고, 자기 모습을 감추거나 매번 변형시키지 않고서도 훼손되지 않는 단단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은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감정 앞에 속절없이 휘청거리고, 굳게 다지고 또 다졌던 결심도 한순간에 손바닥 뒤집듯 바꾸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조차 속이기도 하고, 그렇게 빈틈없는 가면 뒤에 아무리 숨어 보려 해도 결국 타인과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감한 기계에게서 어떠한 위로를 찾게 되는 다희의 모습은, 인간들에게 지칠 대로 지쳐버린 후가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었을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배’는’ 빈말 안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라는 다희의 말은 지수에게 더욱 쓰라리게 다가온다. 소중한 존재들을 잃었을 때 공감이나 위로 대신 의심의 눈길을 보내던 사람들, 나이 많은 고졸 여자 인턴이라는 이유로 수군거리던 사람들과 당신은 다를 거라 믿었다는 뜻이기에. 다희가 상처입게 된 계기는 지수가 다희를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다희의 위계적 차이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던 데 있다. 비록 그 실수가 아주 사소한 것이었고 한낱 무심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견고한 현실의 벽을 온몸으로 들이받아야 했던 다희에게 그러한 태도는 편안하고 따뜻한 스노우볼 내부의 세계에서 바깥의 달팽이에게 던지는 돌과도 같았을 것이었다. 평등했던 관계에서 위계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 그 관계는 더는 온전하게 지속될 수 없다. 그것이 제아무리 깊은 신뢰와 애정, 그리고 기나긴 시간의 더께 속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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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결국, 사람이라는 것

그러나 상처로 남았다고 해서, 그들이 함께했던 일 년의 시간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마음 둘 곳 없이 사람들 사이를 부유하던 지수는 그 일 년의 시간 이후 비로소 지대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설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죽지 못해 체념한 채로 살아지던, 그와 함께 견뎌내야 하는 시간조차 사라지던 지수의 삶은 어느덧 ‘사라지는 것은 없’는, ‘여전히 그녀인 채로 살아 있’는 온전한 삶으로 변해 간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말대로,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다희의 눈썹. 다희가 얘기할 때 눈썹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에게 눈썹이라는 게 있었구나, 눈썹이라는 것이 꼭 마음과 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그리고 사실 그녀는 귤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게 껍질을 까서 하나하나 손바닥에 올려주던 마음이 고마워서 그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고, 결국엔 귤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다희가 더 깊은 이야기를 할까 한편으로는 두려워했다는 말도. 사람들은 때로 누군가에게 진심을 털어놓고는, 상대가 자신의 진심을 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상대를 증오하기도 하니까. 깊은 이야기를 할수록 서로에게 가까워진다는 것을 그녀는 애초에 믿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지만 다희가 그녀로 하여금 말하게 했다고, 그 사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떠나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는 사실도.


– 최은영, 「일 년」

그러므로 그녀는 그 일 년의 시간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특별한 몇몇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며 또다시 진실하고 깨끗한 마음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자신을 언제든 상처 입힐지도 모르는 변덕스럽고 불완전한, 그러나 그렇기에 가장 인간적인, ‘사람’으부터만 받을 수 있는 위로라는 것이 있다는 굳은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 최은영, 「고백」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말이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인간이 신 없이 종교적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무신론자인데,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 신형철,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 — 랭보에게서 이영광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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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다시, 롱-쇼트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관계에 유독 사무치던 날이 있었다. (그때 나는 퍽 무해한 눈빛을 하고 있었으나 실은 몹시도 유해했다.)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을 안고 아무렇게나 거리를 헤매던 발길이 영화관 앞에 가 머물렀다. 그대로 서서 입구에 붙은, 채플린이 남겼다는 구절을, 한참 보았다.

인생은 클로즈업으로 보자면 비극이다. 그러나 롱쇼트로 볼 때는 희극이 된다.

– 찰리 채플린

이를테면 최은영이 포착하는 세계는 대부분 클로즈업된 쇼트 같은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결코 화려하거나 거창하지 않으며, 오히려 흰 조약돌처럼 깨끗하고 소박하다. 그 시간은 둘만의 이야기가 흐르는, 한 사람이 가만히 귤을 까서 다른 사람의 손바닥 위에 알맹이 하나하나를 건네주는, 그야말로 무해하기 그지없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래서일까. 거기에는 번번히 슬픔의 얼굴이 비극처럼 예견되고 있다.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에게 가장 무해한 사람이고 싶었던 인물들의 소망은 한순간의 실수와 오해로 인해 어그러지고 만다. 그러한 실수와 오해는 일견 작아 보이지만, 눈썹이 그리는 긴 곡선과 차 안에 퍼진 귤 향마저 선명하게 클로즈업된 그들의 세계에서 그 파장이 불러일으키는 균열은 모든 것을 무너뜨릴 만큼 치명적이고, 유독하다. 그렇기에 그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파열음은 그들이나 독자 모두에게, 더욱 고통스러운 여운을 남긴다.

그러나 이 세계를 단순히 슬픔에 찬 공간으로만 그려내지 않는 것, 그것은 최은영의 소설이 건네는 어떤 조그만 위로의 말 같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한때 따스했던 그들만의 이야기가 영영 무너져 내린 것 같다가도, 최은영은 마지막에 그들에게 시간을 건너뛰어 다시금 그때 그 시절을 차분히 마주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를테면 「일 년」이 그렇고, 「쇼코의 미소」가 그렇고, 「씬짜오, 씬짜오」가 그러하며, 「그 여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이 오랜 해후는 과거 그 시절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그리고 그 시절에 아픔을 남겼던 스스로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모래가 떠나고 난 후 오래 전 자신을 찾아왔던 모래가 빨리 떠나기를 바랐던 기억을 ‘찬바람에 몸을 떨었’던 죄책감으로 분명하게 상기하는 선미의 모습(「모래로 지은 집」), 16년 전 수이와 자신이 바라보던 그 강물을 바라보며 ‘입을 벌려 작은 목소리로 수이의 이름을 불러보’는 이경의 모습(「그 여름」)이 그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최은영이 「일 년」에서 지수가 다희와 병원 — 병원은 아픔과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공간이지만, 동시에 그 아픔으로부터 회복되는 공간이기도 하기에 그 자체로 양면적이다 — 에서 해후하도록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소설의 첫 장면은 수술한 지수가 병실에 누워 있는 것으로 시작된다. 병실에서 지수는 처음 병문안을 온 회사 동료들을 얼마간은 반갑게 맞이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한때 누구보다도 그녀를 아프게 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상기한다.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곧 나을 것이라는 모르핀 같은 위로를 건넸음에도, ‘피와 진물을 받아내는 주머니를 몸에 달고 있는’ 이때 그녀에게 병원은 회복이 아닌 고통의 장소다.

그러나 팔 년만에 우연히 다시 만난 다희의 긴 눈썹이 곡선을 그리는 것을 골똘히 바라보며 지수가 떠올리는 것은 다희와 보냈던 진정으로 따스했던 일 년의 기억이다. “많이 아팠나요?”라며 다희가 재차 물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아픔을 긍정하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퇴원하는 지수의 모습은 그녀가 비로소 아픔을 견디고 삼키며 살아내야 했던 시간을 통과하여 나아가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지수의 입원과 퇴원 사이에는 그녀가 다희와 함께했던 시간을 다시금 거슬러 올라가 새삼 소중하게 되새기며,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빛이 되어주었기를’ 잠잠히 바람으로써 과거 다희에게 상처를 남긴 것을 담담히 속죄하는 시간이 있다. 지수가 퇴원한 후 그 길고 고르게 내쉬는 숨결같은 시간 위에, 다희가 떠나던 날과 같은, 그러나 그날의 그것과는 또 다른 눈이 정화하듯 내려와 흰빛으로 덮인다. 그렇게 최은영은 인물들의 이야기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롱쇼트로 조감함으로써, 그들이 한때 쌓아올렸던 세계에 깨끗하고 단단한 윤리 의식을 담아낸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신형철을 인용해야겠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한 인간이 제 진실에 베여 돌이킬 수 없게 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다. 소설가들이 내면성을, 즉 충동과 욕망을 탐구하는 것은 삶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아지지 않는 이유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설의 인식론은 결국 소설의 윤리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알고자 하는 마음은 살고자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이 있다면 그는 소설을 읽지 않을 것이다. 모르는 것이 없기도 하지만 그보다 살고자 애쓸 필요가 없을 것이므로.) 그러나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음’ 단계를 생각하고 그것을 지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대하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도 진실 앞에 선 인간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진실에 응답한다. 응답(response)하는 능력(ability)을 발휘한다는 것은 진실에 책임(responsibility)을 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실 이전으로 되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진실이 초래한 변화를 감당한다는 것이다.


– 신형철, 「신은 소설을 읽지 않는다 — 소설에서 ‘인식’과 ‘윤리’에 대하여」

그러니까 말하자면, 당신을 사랑해 보자는 것, 당신과 나만 아는 특별한 소설을 써 나가겠다는 것, 그 소설로 인해 달라진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감당해 낸다는 것, 그렇게 당신에게 책임을 진다는 것, 그럼으로써 당신과의 이야기에는 아픔보다는 위로가 조금 더 스며들길 바란다는, 멀고도 아득한 이야기.

그리하여 우리는 한껏 클로즈업된 렌즈 속으로 또다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서로에게 상처입을, 또는 상처입힐 가능성을 묵묵히 등에 업은 채, 그러나 내딛는 한 걸음마다 조금은 더 선하고 무해한 관계가 담긴 롱-쇼트로 이어지기를 조심스레 소망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한 걸음씩, 때로는 머뭇대고 발을 헛디디면서도 어깨를 맞대고 묵묵하게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은, 최은영에 기대어 서서 늘어놓은 나의 서투르기 그지없는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또한 하나의 헛도는 방백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으나. 다만 다음 발걸음은 책임이라는 무게에도 조금 더 단단하게 가 닿을 수 있기를, 나 역시 잠잠히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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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
choha@yonsei.ac.kr
나, 너, 그리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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