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필명과 함께 첫인사를 드립니다. 있을 유(有)에 채색 채(彩)를 씁니다. 본래 동아리에서 쓰던 이름에 한자 뜻을 새롭게 붙였습니다. 유채-라고 불렸을 때 입과 입 사이에서 맴도는 따뜻한 온기가 좋아서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서 헛웃음이 나왔지만, 퍽 마음에 드는 이름입니다. 왜 그런지를 얘기하려면 제 본명에 관한 얘기를 잠깐 해야 합니다.

본명의 뜻을 좋아합니다. 밝을 현(炫)에 도울 우(佑)를 씁니다. 어둠의 바로 옆에 붙어있는 밝은 불이 되어, 사람의 옆에 서서 사람을 도우라는 뜻입니다. 마냥 밝은 불이 아니라 어둠(玄)의 옆에 있는 불이라서 좋고, 사람의 옆에 서 있는 친구(友)라서 좋습니다. 이름따라 살아간다고들 말하지만, 이름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지고 가고 싶은 태도인만큼, 이름 뜻을 살리는 필명을 짓겠다고 예전부터 정해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뜻을 살리려고 하니 마땅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현 자를 살리려고 하니 단현의 필명과 겹치고, 우 자를 살리려고 하니 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애당초 굳이 본명의 뜻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울림을 좋아하지 않아섭니다.

‘돕는다’는 말의 오만함을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을 비판하려는 건 아닙니다. 타자를 대하는 나의 태도와 위치를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의 옆에 서 있겠다고 말하는 나에 대해서요. 돕는다라고 말하는 나는 도움을 주는 사람, 내지는 도와야 하는 대상이라는 말로 누군가를 타자화하고 규정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돕는다고 말하는 나는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내가 서있는 위치는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하고 서있는 층위가 아닌지를. 나는 내가 알 수 없는 것들까지 어둠으로 뭉뚱그려서 똑똑한 척 멍청하게 서 있는 오만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따위가 아닌지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명암의 이분법이 마음에 들지 않으므로, 불꽃에 색을 칠하고자 합니다. 그런 의미의 有彩입니다. 성산일출봉 앞에 피어있는 유채꽃을 본 사람들은 모두 색이 노랗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특정 순간의 유채꽃의 색은 어느 누구에게도 같지 않습니다. 색은 결국 물질에 반사되어 눈과 신경을 거쳐 뇌에 전달되는 파동이므로, 본질적으로 시점에 달라지는 개인적 특성입니다. 순간의 노란색은 각자에게 고유한 색으로, 기억의 형태로,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모습으로, 남습니다. 눈을 아프게 하지 않는 색을 가지고 싶습니다. 감히 고유함을 이야기하지만, 읽는 사람이 슬프고 아파서 눈물짓지 않는 색을 가지고 싶습니다. 고통에 대해서 쓰겠다는, 아마도 훨씬 더 오만한 꿈을 꿉니다.

2.

‘부차적 피해(collateral damage)’ 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폭탄을 떨어뜨리라고 명령하는 사람들에게는 수치화 해야하는 부차적 문제이지만, 폭탄 아래의 사람들에게는 전부인 문제에 대해서. 폭력의 역사를 다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무 책상에 앉아서, 내가 알 수 없는 고통과 삶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나’를 조망합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히 많은 상품들을 봅니다. 내가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구매한 코로나 맥주따위를. 그리고 제조회사 컨스텔레이션 브랜드의 맥주공장 건설로 말미암아 멕시칼리에서 일어나게 될 물부족 사태를 생각합니다. 공장 가동을 위해 사용되는 천연가스가 생산되는 이스라엘 서쪽 바다에 인접해있는 가자 지구를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4월 7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총선 승리 시 1967년 전쟁으로 획득한 요르단강 서안 점령촌 병합을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순간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순간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세상을 먹고, 마시고, 구매하고, 소비합니다. 살아감이 있고, 고통이 있으며, 자행되는 폭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먹고 마시고 구매하고 소비하는 일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사상적, 체제적 정당성을 단단한 초석으로 삼아 거대한 성을 쌓습니다. 어떤 살아냄이, 혹은 올바름이 부딪치더라도, 정당한 자본의 논리는 ‘정당’하기 때문에 몸집을 계속 불릴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살아냄’을 저지하는 폭력조차도 강렬하고 자극적인 감정적 이미지로써 소비됩니다. 때때로 이미지의 소비는 ‘살아있음’을 강요합니다. 강요는 살아내고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묵살하는 형태로 작용합니다.

관점의 교차와 변화의 앞에서. 현상의 옳고 그름을 얘기하지 않고 전략적으로 바라보며, 인센티브를 어떻게 얻어낼 것인지에 대한 관점이 존재합니다. 거의 명백하게 이런 관점이 움직이는 세상이 있습니다. 고통의 층위에 관한 이야기와 인센티브의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말하는 ‘나’ 역시 세상을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불연속적인 존재입니다. 대책 없는 위로가 그네들을 슬프게 만들 때, 불연속성 앞에서 한없는 무력감을 느낍니다.

무력해지지 않기 위해 글을 씁니다.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 때문에 동일한 색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현상이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색을 벗겨내고자 합니다. 여러 관점들을 파편화하여 나열할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다는 욕심에서 비롯되어버린 생각입니다. 이론에 닿아있는 부분, 경험과 현상에 닿아있는 부분 양쪽 모두의 끈을 꼭 붙들고 움직이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파편의 지평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불연속적인 관점들을 이어내는 연속적인 채색의 가능성을 기대합니다. 살아감을 강요하지 않고 살아가자고 말하기 위해. 움직이기 위해. 이 글을, 지평에 닿기 위해서 채색하는 기민함을 잃지 않기 위한 약속으로 두고 싶습니다.

유채
dksrud63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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