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질에 관한 탐구” (2)

대안적 본질 개념

잠재성


한가지 투박한 스케치는, 본질을 그 개체의 잠재성으로 보자는 것이다. “잠재성”을 통해 일컫고자 하는 것은 어떤 개체가 갖는 가능한 양태의 총합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배타적인 속성 P, Q, R 각각이 a의 본질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한, 그 속성들에 대해 어떤 a는 현실적으로 P인 반면, 그는 Q이거나 R일 수도 있었음이 동시에 참이다. 그렇다면 a의 본질을 우리는 그것의 가능성인 “a는 P이거나 Q이거나 R일 수 있었다”(◇Pa&◇Qa&◇Ra)를 포함하는 기술구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a가 갖는 불가능성을 이 기술구에 포함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는 a가 S이거나 T임이 불가능하다고 여길 수 있다. 이 경우 a의 본질은 “a는 P이거나 Q이거나 R일 수 있었고 S이거나 T일 수는 없었다”(◇Pa&◇Qa&◇Ra&(~◇Sa)&(~◇Ta))를 포함하는 기술구가 될 것이다.

(나는 들뢰즈의 “주름”, “구배” 개념이나 화이트헤드의 “영원한 객체” 개념에서 유사한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가능성의 총합으로만 본질을 생각할 경우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는 개체가 하나의 세계에 무한히 늘어날 것이라는 데에 있다. 예컨대 일란성 쌍둥이에 대해서, 우리는 그들의 (생래적인) 가능태가 동일하다는 데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두 사람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당연히도 둘은 다른 개체이기 때문이다. 둘은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본질은 다름 아니라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고, 다른 것이 아니게 하는 무엇이다. 결국 우리는 쌍둥이를 동일자로 여길 수 없고, 따라서 둘은 본질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능태로부터 바로 본질이 나올 수 없게 된다.

가능한 탈출구는 “가능한 양태” 앞에 “~인 세계에서”를 붙여보자는 것이다. 즉 속성 P~T만이 존재하는 a의 세계에 있어, a의 본질은 기술구 “◇Pa&◇Qa&◇Ra&(~◇Sa)&(~◇Ta)”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a의 상대역이 있는 모든 세계들에 대한 진술로 다시 쓰여야 한다. a는 스스로를 현실 세계에서의 상대역으로 가지므로, 이 기술구에는 현실세계에서 참인 Pa가 포함된다. 즉, a의 본질은 “현실에서 P이고, 이러저러한 세계에서의 상대역은 Q이고, … 어떤 세계에서도 S이거나 T인 개체를 상대역으로 가질 수 없음”이다. 현실세계에 동일한 두 대상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이 기술구는 a에게 고유하며, 모든 세계를 역으로 둔다는 점에서 a에 관한 필연적 내지 원초적 사실을 제공한다.

(이렇게 생각되는 본질 개념은 상당히 외연주의적인 방식의 본질 정의이다. 개체의 가능태란 (상대역 이론을 수용할 때) 그 개체에게 대응되는 대상들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되는 본질은 의미론적 차원에서도, 초월적 차원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우리의 양상 직관을 위해 이미 놓여 있는 가능체들의 차원에서 발견된다.)

어떤 문제

이 이해가 갖는 문제가 있다. 먼저 a의 본질에 관한 기술구를 축약해서 ‘A’라고 부르자. 이상하게도 이 방식의 본질 이해는 본질을 필연적 속성으로 여김에 따라 참이라고 간주되었던 “☐Aa”와 같은 문장을 반드시 참이게 하지 않는다. 상대역 이론을 수용할 때, Aa로부터 추가 공리 없이 ☐Aa가 나오려면 a의 모든 상대역들에 있어서 A임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는 하나의 양상적 사실에 대해 동일한 사실을 모든 a의 상대역이 공유한다는 강한 전제가 있어야만 승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전제가 수용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A가 a의 본질일 때에도 ☐Aa는 참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큰 문제가 되는지는 의문이다. a의 본질이 필연적 사실이어야 한다는 것은, 실제로 a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에 있어 그 생각이 바로 그 a에 관한 생각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a의 본질은 이러저러한 상대역들을 가지는 것과 같다고 하더라도, 이 때 이미 “바로 그 a에 관한 사실임”은 상대역 관계에 의해 조금 변형된 방식으로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A가 a의 본질이라면 Aa만으로 충분히 필연적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다. 굳이 Aa”가”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잠재성을 통한 본질 이해는 “바로 그 대상에 대한” “필연적 사실”이라는 전통적인 본질 이해를 잘 반영할 수 있다.

통념에 반하여

개체본질이 정말 무의미한가

개체본질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의 전제는 그것이 검증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논증이 타당하려면 두가지 점이 참으로 규명되어야 한다. 우선, 어떤 개체의 본질은 경험적으로 알려질 수 없어야 한다. 또, 경험적으로 알려짐에 따라 검증되는 사실이 아니라면 무의미해야 한다. 그런데 두번째 사항에는 조건이 추가되어야 한다: “그것이 타당한 추론에 따라 알려지는 것이 아닌 한.” 수학적 진리나 개념적 진리는 경험적으로 알려지지 않지만 유의미한 참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번째로, 개체본질에 관한 사항은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없어야 한다.

개체본질에 관한 사항은 오로지 선험적으로는 알려질 수 없는가? 그렇다. 어떤 개별자에 관해서도, 그것을 경험 없이 알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그 개별자에 관한 선험적 앎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개체본질에 관한 사항은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없다. 한편 그러한 본질은 경험을 통해 알려지는 것 같지도 않다. 경험은 오로지 그 대상의 현실적 상태를 알려줄 뿐, 그것이 갖는 형이상학적 본질을 직접적으로 알려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체본질은 정말로 무의미해 보인다.

그러나 위의 스케치를 생각해 보자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본질을 발견할 수도 있다. 먼저, a가 하나의 개체라는 것은 그것에 관한 면식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a’를 개체상항으로 사용할 때 우리는 바로 그 이름이 지시하는 대상이 어떤 의미로든 “존재한다”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a의 속성, 상태, 행위 등을 발견할 수 있다. 또, 현실 세계가 하나의 가능한 세계라는 직관이 옳다면 (그리고 그 직관은 그릇되기 정말로 어렵다) “현실에서 a가 P이다”로부터 “a가 P인 것이 가능하다”(=이러저러한 세계에서 a는 P이다)는 타당하게 나온다.

본질은 한 개체가 갖는 잠재성의 총합이다. 우리는 a가 바로 지금 P임을 안다. 그렇다면 a의 본질에는, “현실 세계와 같은 세계에서 P임”이 포함된다. 또 언젠가 우리는 a가 Q였거나 R이었음을 관찰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또한 (a의 본질이 통시간적으로 유지된다는 가정 하에) “이러저러한 세계에서 Q임”과 “그러저러한 세계에서 R임”이 포함된다. 이렇게 포함된 기술들로부터, 그 기술들에 대해 모순되는 기술들을 선험적 규칙에 따라 부정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a의 본질 전체를 알 수는 없더라도, a의 본질에 관한 가설들을 검증할 수는 있다.

다시 말해 a의 본질을 후험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단현의 본질이 “정씨 일가에서 태어났음”이라고 믿는 경우, 알고보니 그가 다른 혈통을 갖고 태어났었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것이 단현의 본질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단현의 본질이 “봄이 오면 버지니아 연초를 태움”을 포함한다고 믿고, 실제로 모든 봄에 버지니아 연초를 태운다면 그것이 그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확증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개체의 본질을 과학적 발견과 같은 방식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과학적 발견은 무의미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외연주의적) 본질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무의미하지 않음을 주장할 수 있다.

개체본질이 정말 악한가

개체본질이 비윤리적이라는 주장의 전제는 그것이 특정한 방식의 억압을 부른다는 것이다. 예컨대, 파상이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며 또한 남성의 본질에 “파란색을 싫어함”이 있다고 우리가 믿는다면, 파상이 파란색 옷을 자주 입을 때 우리는 그를 “비정상적”이라고 보거나 “잘못된 처신을 하는 자”라고 간주할 것이다. 그런데 파상이 실제로 파란색을 좋아한다. 우리는 전제들로부터, 그의 선호 체계가 수정되어야 함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어떤 욕망을 정치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폭력적이다. 따라서 개체본질은 비윤리적인 정치적 행위를 야기하며, 그 개념은 폐기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이는 적어도 두가지 문제를 갖는다. 하나는 이 주장이 존재적 차원과 인식적 차원의 혼동에서 왔다는 것이다. 상기한 폭력의 사례는 남성의 본질이 이렇고 저렇다는 우리의 믿음으로부터 야기된 것이지, 실제로 어떤 종이나 개체에게 본질이 있거나 없다 또는 그것이 규정될 수 있거나 없다라는 존재적 사실로부터 야기된 것이 아니다. 이 사례에서 존재적인 사실은 파상이 생물학적 남성(사례에서는 이것이 참으로 간주되었으므로,)이라는 점과 파상이 파란색 옷을 자주 입는다 또는 파상이 파란색을 좋아한다라는 사실 뿐이다. 만일 존재적 차원에서, 파상이 남성이며 남성의 본질이 파란색을 싫어함이었다면, 파상은 파란색을 싫어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어떤 개체의 본질에 관한 우리의 믿음이 그릇될 수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또, 설사 그것이 남성이나 파상의 본질이라 하더라도 이는 흄의 오류를 피하지 못한다. 존재적 차원에서 남성이나 파상이 이렇거나 저렇다는 것은, 단지 존재적으로 그러하다는 것만을 말한다. 만일 남성의 본질이 파란색을 싫어함이라는 존재적 사실로부터 남성은 파란색을 싫어해야 한다는 당위적 사실을 추론한다면 이는 오류 있는 추론이다. 어떤 사실은 단지 그 사실만을 진술하지, 그 사실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주장을 동시에 진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모든 사실은 필연적 사실일 것이며, 모든 행위는 당위의 실현일 것이며 … 등등의 그 자체로 의심쩍은 주장이 귀결된다.

반면 존재론은 모종의 본질 개념을 요구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 대상으로 사유할 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모든 경우에 바로 그 대상에 관한 생각이게끔 하는 그러한 형상”이라는 개념을 규정하게끔 방향지어지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다름 아니라 본질이다. “파상임” “남성임” “단현임” “버지니아 연초임”과 같은 개념이 어떤 지위를 갖는지를 말하자면 종래의 본질 개념이 사용될 수밖에 없고, 그것이 불가피함에 따라 가능한 한 무해한 본질의 정의를 내놓아야 한다. 이렇게 요구되는 개념에 있어, 그것에 관한 오류 있는 주장이 본질의 유해성을 주장한다는 근거로 본질 개념을 삭제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개체본질의 해악은, 오직 특정한 누군가에 대해 그 본질을 부과할 때의 결과이다. 그런데 철학은 그러한 부과와 관련이 없다. 철학이 본질의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특정 개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개념이 어떤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이 모종의 정치적 해악을 부른다면 그것은 본질 개념을 사용하는 그 공동체와 관련이 있는 것이지, 본질 개념을 정초한 철학 자체에 관련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본질 개념은 윤리적으로도 무고하다.

반본질주의에 반하여

내가 논구한 바는 이렇다. 본질에 관한 회의적 시선이 존재한다. 그러나 본질이 갖는 존재론적 기능을 생각할 때, 본질의 개념을 삭제하기보다는 무해한 방식의 본질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 낫다. 나는 그러한 대안으로서 “잠재성”을 통해 본질을 발견하길 제안한다. 이 경우, 반본질주의의 두 방식이 문제삼는 우려는 ‘본질의 본질’로부터 사라진다. 본질은 과학적 사실과 동일하게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으며, 또 본질은 오로지 사실에 관해서만 말하므로 어떤 비윤리적 당위도 (그 자체로는) 함축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의 제안과 같이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 본질의 정의에 맞다면, 본질의 무해함이 사라지면서도 그것이 갖는 존재론적 의의가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반본질주의의 핵심에는 그것의 실용적 유해함이 있었다. 나는 그 유해함을 제거하면서 반본질주의는 갖지 못하는 효용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실용적으로도 더 큰 가치를 지니므로, 본질주의는 반본질주의에 비해 실용적으로도 우세하다. 따라서 반본질주의의 반론이 채택될 이유가 적다.

(직관적인 부조리함을 해소하고 다른 난점들을 고려하기 위해, 이 스케치는 보충되고 더 상세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다.)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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