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용들엔 주석이 필요가 없다

근대는 단지 소설이란 문학 형식을 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근대라는 시대 자체가 소설적인 이야기를 요청한 게 아닐까. 근대에 들어서 사회가 체험한, 격렬한(drastic) 변용. […] 근대라는 시대가 거기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가져다 준 심적 외상─그 부조리함 때문에 언어로 명명되고 ‘경험’으로 길들여져 과거로 내던질 수밖에 없는 ‘사건’의 폭력. 그처럼 말로는 이야기될 수 없는 체험, ‘사건’을 서사로서 말하라는 시대의 요청을 소설은 자신의 몸체에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꿔 말하면, 소설의 말하기는 그러한 사건의 불가능한 나누어 갖기[分有]의 가능성을 내걸고 있는 게 아닐까. (63)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 것인가.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나누어 갖기 위해서 ‘사건’은 우선 이야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전달되어야만 한다.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진정으로 나누어 갖는 형태로 ‘사건’의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그와 같은 서사는 과연 가능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리얼리즘이 보여주는 정교함의 문제인 것일까. 그렇지만 리얼하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수많은 물음이 생겨난다.
다양한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억의 항쟁 그 한복판에 우리가 서 있는 현재, ‘사건’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데에는 비평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39)

오카 마리. 김병구 역. “기억 서사”. 2004.

끊임없이 다시-기억하는 것으로서의 기억하기는 텍스트를 주고받고 나눠가지는 일로써만 가능한 게 아닐까?

(단현. 다시-기억하기, 애도의 목소리. 19.4.3.)

실패랑 패배는 다른 것 같아.

19.4.8. 김연수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읽고 대화하던 중 단현의 발언.

.

.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57)

혹시 한국에 있을 때, 조선전쟁과 관련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가? 거기에는 지평리전투가 어떻게 기록돼 있는가? 지평리전투에서 죽은 인민지원군 병사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기록돼 있는가? 이곳 역사책에 기록된 죽은 미군과 마찬가지로 다만 숫자로만 남아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잔뜩 부풀린 숫자로만. 지평리전투에서 죽은 인민지원군의 숫자는 5천명에 달했다네. 그 처참한 광경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뿌넝숴. 뿌넝숴. 역사라는 건 책이나 기념비에 기록되는 게 아니야.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몸에 기록되는 거야. 그것만이 진짜야. 떨리는 몸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말해주는 게 바로 역사야. 이 손, 오른손 검지와 중지가 잘려나간 이 손이 진짜 역사인 거야. 생각해보게나. 조선전쟁이 일어난 지 채 일백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나라로는 한때 우리가 괴뢰군이라고 부르던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하지 않는가? 지평리에서 죽은 병사들에 대해서는 다 잊어버린 셈이지. 고작 일백년도 지나지 않아 망각할 그런 위의 실 기록한 책과 기념비. 그게 로 지금 자네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이 아닌가? 그런 책 따위는 다 던져버리게나. 내 손보다도 못한 그따위 책일랑은. 나는 죽고 나서도 이 손가락의 사연은 잊지 못할 거야. 바로 이런 게 역사란 말이야. (69-70)

그녀는 그런 내 손을 잡고 말했어. 자신이 지평리에 본 것에 대해서는 정말 말할 수 없다고. 뿌넝숴. 뿌넝숴. 그날 밤, 도합 800그램의 피를 병사들에게 수혈하면서 세상의 모든 남자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싶었던 그 마음을 도저히 말할 수는 없다고. 다시는 총을 잡지 못하도록 다 잘라버리고 싶은 그 마음을. (74)

책에 씌어진 얘기가 아니라 두 눈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 얘기하게나. 두 눈으로 보이는 그 광경이 무엇을 뜻하는지 온몸으로 말해보게나. 뿌넝숴. 뿌넝숴. 그런 말이 터져나올 때까지 들려주게나. (77)

김연수. ‘뿌넝숴(不能說)’.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창비. 2005.

괜히 질문을 하나 했다가 붙잡혀 지루한 썰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야기 「뿌넝숴不能說」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떤 소설가가 중국에 간 것 같다. 그는 어딘가 저잣거리 점집에 들어갔다. 점집에 앉아 있던 노인은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가 없었다. 소설가의 직업정신이 발동했을 것이다. 그는 노인의 손에 얽힌 사연을 물었다. 노인은 기다렸다는듯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노인은 남북전쟁 당시 한반도로 넘어온 중공군이었다. 그는 1951년의 지평리 전투에 참전했다. 그곳에서 중공군은 궤멸되었고 한 간호대원이 생사의 기로에서 그를 구출했다. 그러나 둘은 이동 중에 공격당해 고립됐다. 간호대원은 부상당한 그에게 1kg 가량의 피를 수혈하고 먼저 숨을 다했다. 살아남은 그는 노인이 되어, 몇십 년이 지난 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중국에 온 한국인 소설가에게.

역사에서 노인의 이야기는 거대 서사로 흡수된다. 역사책이나 기념비에는 숫자와 결과만 나와있을 뿐이다. 한반도 한복판에 흘러들어온 중공군 노인과 간호대원 조선 여인의 이야기는 거기에 없다. 노인은 ‘이 손이 진짜 역사’라고 단언한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몸에 기록’된다고. 지평리에 묻힌 전사들의 육신은 저마다의 증언과 함께 사라졌다.

이때 ‘뿌넝숴’는 재현의 영토 끝에서 응결하는 단어다. 노인과 간호대원이 경험한 전쟁터는 말로는 절대 전달될 수 없다. 오로지 그들의 몸에만 새겨져 있다. 소설가는 그들의 몸과 생을 겪을 수 없고 이 텍스트를 읽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새겨진 것은 글자일 뿐, 그들의 육신에 새겨진 전쟁은 말로는 이해할 수 없는 너머에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증언 불가능한 경험을 억지로 텍스트화한 실패작인 건 아닐까. 아니, 어쩌면 이건 실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뿌넝숴. 뿌넝숴. 그런 말이 터져나올 때까지 들려주게나.’ 더 이상은 말할 수 없을 때까지, 뿌넝숴, 라는 말이 터져나올 때까지는, 노인은 전부를 말해낸 셈이기 때문이다.

쉽게 서사화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을 더 이상은 말로 해낼 수 없을 때까지 말해내기. 이 때 사건의 증언불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증언불가능한 사건의 존재 자체를 드러낸다. 말로 가능한 것까지를 모두 말해낼 수 있다면, 그 영토를 그려낼 수 있다면, 그 너머의 존재가 잉여분으로서 나타난다. 조금은 불가해한 표정일지라도.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는 이 소설의 첫 문장이다. ‘뿌넝숴’를 입에 달고 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노인이 선택한 첫 마디다. 정말이지 짓궂은 노인이지만, 어쩌면 이런 능글맞은 시작은 모든 소설이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

.

겨울의 눈빛으로

그러나 불가능성에 대한 생각 없이 시작한 이야기는 어떤 결말을 맞는가. 언어는 어떨 때 실패, 아니 패배하나.

그때 모자는 평소보다 잠꼬대가 심해졌다. 모자야 내가 여기 있어. 감독은 모자의 배를 쓰다듬어준다. 개는 끙끙거리고 헛발질을 하고 자다 벌떡 일어나 컹컹 짖다 다시 잠들고 네 다리를 축 늘어뜨리거나 온몸을 긁는다. […] 감독은, 모자는 마치……. 마치 무언가를 잊고 싶다는 것처럼 자다가 고개를 흔들었어요 하고 말했고 나는 그 대사가 좀 웃긴다고 생각했고 이건 뭔가 좀 뻔하잖아 싶어서 웃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무도 웃지 않는 그 장면을 혼자서 곱씹었다. 개가 사고에 대한 공포로 악몽을 꾸는 것이라 모두들 생각하고 싶어 했다. 나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개의 꿈을, 개가 꾸는 꿈을 하고 입에 올리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까먹고 바로 웃음이 나왔다. (92-93)

그도 그럴 것이 그 영화는 고리 핵발전소 사건 이후 쏟아져 나온 고리 영화 중 하나라는 정도의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남아 있는 사람들, 고리라는 혹은 해운대나 부산이라는 공간에 남은 사람들의 기억과 그 사람들의 상처를 이야기한 영화들. […] 나는 차라리 한국수력원자력공사를 폭파하고 그곳의 간부들을 납치해서 인질극을 벌이는 말도 안 되는 그런 영화를 보고 싶었다. 간부의 머리 하나와 원전 하나씩을 걸고 한 시간 동안 대치를 벌이는 뭐 그런 영화. 인질의 집 앞뜰에 우라늄을 묻어버리고 잠옷 차림의 그를 폐기물 처리요원으로 보내버리는 뭐 그런 영화. 갱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뛰어다니는 그런 영화. 나는 그런 게 보고 싶었다. (97-98)

박솔뫼. ‘겨울의 눈빛’. “겨울의 눈빛”. 문학과지성사. 2017.

박솔뫼는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가능세계를 그리고 있다. 꽤 심각했던 모양이다. 방사능 유출 때문에 사람들은 부산을 떠났다. 아직 남은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도시는 어쩔 수 없이 통채로 죽어가고 있다. 남은 사람들은 노인들이 대다수고 백혈병이 발병하기도 한다. 서술자 ‘나’는 사고 이후 해운대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관람한다.

감독은 하루아침에 삶의 기반이 무너져버린 자갈치 시장의 상인 하나가 목을 매자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는 사고 이전의 해운대를 정성스럽고 아련하게 묘사한다. 이제는 갈 수 없는, 화려했던 곳. 다큐멘터리의 사람들은 슬퍼하고 환멸을 느끼고 좌절하고, … 그런데 어째선지 ‘나’는 도저히 이입할 수가 없다.

사고에 대한 공포로 악몽을 꾸는 해운대의 강아지라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거 그냥 개꿈이잖아. 슬픔을 강아지에게까지 씌워서 소비해버리는 식의 식상한 다큐멘터리는 ‘나’에게는 웃기기까지 하다. 뻔한 다큐멘터리를 찍을 바에야 3류 액션 영화가 낫겠다. ‘고리라는 혹은 해운대나 부산이라는 공간에 남은 사람들의 기억과 그 사람들의 상처를 이야기한 영화들’은 널리고 널렸다. 애도의 범람이며 이야기의 패배다.

그러나 ‘나’의 태도는 공감 불능 같은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타인이 겪은 사건에 관한 애도는 쉽게 그리고 자주 기만과 위선이 된다는 지독한 성찰이 깔려 있다. ‘나’가 살고 있는 ‘K시’는 해운대에서 멀기 때문이다. 너무 서늘해서 당혹스럽지만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종류의 눈빛이 있다.

어떤 질문 앞에 서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남자의 친구는 빚을 갚으러 고리 핵발전소 사고 복구사업에 지원했다가 죽었다고 했고 또 다른 예술가 친구는 개인작업을 위해 고리로 갔다고 했다. 그 외 다른 친구들은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 신기하다. 나의 친구들은 대학을 다니거나 회사를 다녀요.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고요.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회사를 다니다가 요즘에는 아무것도 안 해요. 가끔 극장에 가지요. […] 내가 아는 누가 또 누구누구가 지금 무얼 하는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토록 모멸감이 드는 이유는 무어야. 우리가 개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렇게 허무해져야 하는 것은 또 무어야. 마치 태어나서 처음 개를 만져본 사람들처럼. 너는 그렇게 살았구나. 너의 친구는 그리고 또 다른 친구는 그렇게 살고 있구나. 지금 우리는 K시에 있다. 그렇지? 고리가 아닌 K시에 있지. 그러므로 우리는 괜찮으며 괜찮겠지?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 질문이란 질문은 모두 고개를 젓게 만든다. 질문 앞에 서지 못할 사람으로 간신히 어딘가에 서 있다. 그러니까 K시에. 고리와 70킬로미터쯤 떨어진 K시에. […] 나는 이 옷 어딘가에 이 질문을 기억해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어. 왜 나는 모든 질문 앞에서 비틀거리나? 나의 이 모든 이유들은 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나? 이 두 질문을 말이야. 나는 내가 손에 쥔 이 감정을 마음을 잊지 않는다. (102-105)

박솔뫼. 앞의 책.

고리에서 사고가 났는데 나는 내 지인들은 지금 이러저러하게 살고 있고 너는 네 지인들은 또 이러저러하게 살고 있고. 누군가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고리에 갔고 누군가는 가지 않았고. 나는 너는 여기에 있고 고리나 부산에서 멀리 K시에 있고. 그게 다 무슨 의미일까. 어떤 사람들은 고리에 해운대에 있었고 터전을 버리거나 터전과 함께 가라앉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무탈하게 사는 나와 내 지인들의 이야기를 하고, 그런데 나는 무탈한가? 우리는 과연 무탈한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진 않고.

저 거대한 사건과 그 속의 삶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데 그 앞에 서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치가 않다. 슬픔이 아니라 모멸감과 허무함. 그건 사건에 관한 감정이 아니라 그 일을 겪지 않은 나의 감정이다.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사건 앞에 우리는 비틀비틀 선다(서 있다). 그 사건을 직접 그리고 함께 겪고 싶다는 동일화의 욕망은 이제는 피로하기까지 한데 그렇다고 가만 있자니 모멸감과 동침해야 한다.

이를테면 오카 마리는 이 서늘한 조심성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

당사자로서 같은 사건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견디기 힘든 사건을 체험한 타자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타자의 아픔을 분유한다는 것은 타자가 겪고 있는 바로 그 고통을 공유한다는 것일까? 그것은 원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고통받는 사람에 대해 상상적으로 동일화할 때에만 유일하게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적인 것이다.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타자의 ‘공감’을 촉구하기 위해, 동일화를 손쉽게 하려는 담론 전략이 선택될 때─사건의 폭력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피해자의 순수함과 비참함을 강조하는 것은 그 일례인데─, 피해자는 피해자의 고통에 동일화하려는 사람들의 이미지에 알맞게 구성된다. 그리고 그러한 이미지와 맞지 않는 현실이 폭로되면 때로는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 배신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러한 ‘공감’이 사실은 상상에 근거한 것에 불과함을 의미한다. 게다가 동일화를 쉽게 하기 위해서 같은 여성, 같은 인간, 같은 ○○의 희생자……처럼 우리의─피해자와의─동일성이 강조된다. 그러나 그러한 ‘공감’은 본질주의적인 동일성을 전제함으로써 그러한 동일성을 공유하지 못하는 타자를 ‘공감’의 가능성으로부터 배제하게 될 위험성도 있다(나아가 나/우리와 그녀들 사이에 확실히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를 은폐해버릴 수도 있다). (214-215)

타자의 증언을 듣는다는 것, 이는 단순히 어떤 사건의 ‘정보’가 당사자로부터 타자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타자의 고통의 목격-증인이 됨으로써 그 사건에 대해 철저히 무력한 존재로서 사건을 분유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사건은 나를 철저히 무력한 존재로 만드는 폭력으로 자신에게 일어난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나의 ‘공감’이란 우선 사건의 폭력에 대한 나 자신의 이 철저한 무력함으로부터 발화發話될 것이다. (217-218)

오카 마리. 이재봉, 사이키 가쓰히로 역.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현암사. 2016.

함부로 상상하지 않기. 함부로 공감하려 하지 않기. 강아지까지 슬픔으로 동일화시키지 않기. 그건 사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분유하고 싶은 나의 욕망에 관한 것이다. 이 욕망을 포기할 때에야 역설적으로, 분유의 끝자락에라도 닿을 수 있다. 사건을 ‘거듭 기억’한다는 일에는 그 사건이 나에게는 이미 기억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반성이 필요하다. 사건을 기억하고 공감한다는 일은 그 사건을 직접 겪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건 능동적으로 사건에 닿을 수 있는 특권에 가깝다. 이를테면 「뿌넝숴」의 노인에게 지평리 전투는 능동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다. 오히려 잘려나간 손가락을 통해 그를 찾아오는 타자다.

이 철저한 무력함은 그러나, 역시 패배하지는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아는 누가, 때로는 내가 가장 잘 아는 내가 무얼 하며 하루를 보내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어째서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는지는 알 수 없고 그리고 또 언제나 내가 견뎌야 할 모멸감은 나보다 크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들과 함께 오래 살아 남을 것이다.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겨울에는 눈이 오고 눈이 아무것도 가져다주지도 가져가주지도 않는다. 이 눈을 맞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때 거리는 텅 비었고 사람들이 창문을 닫고 집에만 있었고 나는 이불을 덮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로 나는 그 모든 것을 반복할 것이며 그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이라고 어디에서 잠을 자든 그렇게 속삭였다. (109)

박솔뫼. 앞의 책.

‘나는 그 모든 것들과 함께 오래 살아 남을 것이다.’ 고리와 해운대를 뒤로 하고, K시의 나는 여기에 살아 있다. 쉽사리 사건에 다가가지 않고, 그 사건을 기만적으로 슬퍼하지 않으면서. 다만 그 거리를 느끼면서, 살아 남은 나의 모멸감을 어루만지면서. 답할 수 없는 그 모든 질문들을 안은 채로.

그의 눈빛을 상상한다. 이불을 덮고 입은 다물었지만, 이 모든 질문들을 어쨌든 반복하는 사람. 이 ‘겨울의 눈빛’은 여전히 사건들을 응시하고 있다. 차가움과 함께 어떤 사건들은 오래토록 보존될 것이다. 여기에 소설의 희망이 있다. 불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일은, 소설 속 다큐멘터리와 같은 섣부른 진격과 패배에서 언어의 재현 충동을 막아 준다.

그러나 여전히 교착 상태다. 패배하지 않았을 뿐. 언어의 재현적 한계를 넘어, 소설은 모멸감 다음의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가?

.

.

걸어걸어걸어걸어걸음걸어걸음걸이걸어걸어걸음걸음걸음걸어걸어걸음걸음걸이걸어걸음걸어걸이

가마가 말인데요, 하고 내가 말했다.
열 명을 세워 두고 자기에게 가마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하고 물어보면 몇이나 손을 들까요.
음,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한 명이나 두 명쯤은 손을 들지 않을지도 모르죠.
전부 손을 들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고요.
그럼 가마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자기 가마를 유심히 본 적 있는 사람, 하고 물어보면 몇 명이나 손을 들까요.
글쎄요.
무재 씨, 나는 가마는 그냥 가마라고 생각했지 거기에 모양이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가마는 가마지만 도무지 가마는 아닌 가마인가요.
무슨 말이에요?
해 보세요, 가마.
가마.
가마.
가마.
가마.
이상하네요.
가마.
가마, 라고 말할수록 이 가마가 그 가마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죠. 가마.
가마.
가마가 말이죠, 라고 무재 씨가 말했다.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그렇대요?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
가마의 처지요?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요, 뭐야, 저 ‘가마’라는 녀석은 애초에 나와는 닮은 구석도 없는데, 하고. 그러니까 자꾸 말할수록 들켜서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요.
그런가요.
가마.
가마.
가마.
어렵다.
어렵죠.
가마.
가마, 가마, 하면서 탁자 모서리에 달라붙은 마른 파를 바라보았다. 가마는 가마지만 도무지 가마는 아닌 가마라면 가마란 대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는 틈에 살짝 어리둥절해진 채로 앉아 있었다. (37-39)

은교 씨는 슬럼이 무슨 뜻인지 아나요?
……가난하다는 뜻인가요?
나는 사전을 찾아봤어요.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구역, 하며 무재 씨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누가요?
신문이며, 사람들이.
슬럼?
좀 이상하죠.
이상해요.
슬럼.
슬럼.
하며 앉아 있다가 내가 말했다.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나야말로, 라고 무재 씨가 자세를 조금 바꿔 앉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여기서 난로를 팔았어요. 어렸을 때 어머니나 누나들하고 와 보면 멀리서부터 그가 가게 앞에 의자를 내어 두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우리가 오면 그는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잠시 뒤에 나타나선 신문지에 싼 순대를 먹으라고 내주곤 했어요. […] 돌아가신 지가 오래라 그런 기억이란 희미해질 법도 한데 도무지 그렇지가 않아서,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 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슬럼, 하고.
슬럼.
슬럼.
슬럼.
이상하죠.
이상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고, 라고 말해 두고서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113-115)

황정은. “백百의 그림자” 민음사. 2010.

소리내어 따라 읽어 본다. 가마. 가마, 가마. 가마 가마 가마, 가마가마가마가마… 느낌이 이상하다. 가마가 가마가 아닌 것 같다. 혹은 가마가 왜 하필 가마인가 싶다. ‘가마’라고 말할 때, 사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가마’라는 발음일 뿐인데, 그걸로 어떻게 가마를 뜻하게 되나. 물론 모든 일상어에 이런 태클을 걸자는 것은 아니다. ‘가마의 처지로 보면 상당한 폭력’이라는 말은 여기까지는 우스갯소리 정도다.

문제는 슬럼, 슬럼 슬럼 슬럼, 슬럼슬럼슬럼슬럼 슬러어엄 스으을러어엄, 할 때 생긴다. 슬럼을 ‘슬럼’이라고 할 때에 어떤 일이 생기나. 지평리 전투, 지평리 전투, 지평리, 지평리, 지평리, 원전 사고, 원전 사고, 원전 사고, … 이 ‘총칭’을 생각해 본다. 언어는 자주 총칭이다. 당연하며 편리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어떨 땐 기분이 묘하다. 그 때가 중요하다.

황정은의 『백百의 그림자』는 쇠락하는 ‘세운상가’에 관한 소설이다. 주인공 ‘은교’와 ‘무재’는 세운상가에서 생활하며 사라지는 것들, 말할 입을 빼앗기는 자들, 가라앉다가 그림자에 먹혀버리는(비유가 아니니까 궁금하면 읽어 보시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의 대화는 대부분 뜬소리지만 따뜻하고 처연하며 어떨 땐 날카롭다.

이를테면 가마를 가만히 가마가마가마 하고 부를 때의 느낌은 중요하다. 투명하다고 생각했던 언어가 한순간에 불투명해진다. ‘가마’라는 이름으로 포섭할 수 없는 어떤 가마들이 있다. (이를테면 파상의 쌍가마─어릴 적에 내 쌍가마를 신기해하는 아이들 때문에 퍽 피곤했다) 슬럼을 ‘슬럼’이라고 부르는 일에는 특히 어떤 포섭의 음모가 있다.

세운상가 일대를 ‘슬럼’이라고 규정하는 힘에 맞서, 은교와 무재는 세운상가 사람들의 존재를 증언한다. 세운상가에는 수리점 ‘여소녀’의 이야기가 있고 전구점 ‘오무사’의 할아버지 이야기가 있고 은교와 무재의 이야기, 무재의 아버지 이야기가 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라는 말은 날카로워진다.

그러므로 소설 『백百의 그림자』는 어떤 면에서 이름짓기에 관한 일종의 보이콧이다. 물론 이 소설이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정리야말로 이 소설에 대한 올바른 독해가 아닐 것이다. 단지 ‘슬럼’ 따위의 단어로 정리될 수 없는, 너무나도 세부적이어서 함부로 이름붙일 수 없는 삶들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언어의 너머에서 ‘사건 그 자체의 소재’가 드러난다. 百의 이야기들이.

그러나 이건 불가능성에서 온 수동적 결과가 아니다. 혹은 모든 이름들을 지워서 언어 전체를 보이콧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이름들 하나하나를 기억하는 일이며, ‘슬럼’이라는 총칭 대신 그들의 이름을 양각하는 일이다. 여소녀, 은교와 무재, 전구 가게 오무사의 할아버지, 계단 밑의 할머니와 세운상가 사람들, … 쇠락하는 세운상가에서 그림자에게 먹혀 버리는 사람들의 이름을, 쉽게 정리되어서는 안 될 그들의 개별적인 삶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의 불투명성을 무기삼는 소설. 가마가마가마가마, 이건 말장난이 아니다. 스스로의 가능조건을 묻는 소설의 윤리적 기획이다. 우리는 애도를 핑계삼아 이름을 소비해서도 안 되지만, 그들이 눈요깃거리로 전락하지 않도록 구출하는 작업까지 나아가야 한다. 오히려 언어 너머의 사건을 도달 불가능한 지대로 남겨놓는 일이 이따금 ‘슬럼’과 같은 말들을 부른다.

최소한 소설(혹은 언어예술)에 있어서, 언어의 불투명성은 한계가 아니라 무기라는 것이다. 사건을 기억하는 일에는 반드시 그들의 이름이, 우리가 함부로 붙인 이름이 아니라 그들의 원래 이름이, 그래서 삶이, 포함되어야 한다. 일상이 된 언어들의 불투명성을 감지/발견하는 것이 그걸 가능케하는 방법 중 하나다. 그 발걸음을 포기할 때에야말로 사건은 분유되지 않고 왜상만 남는다. 물론 이것은 지난한 일이다.

.

.

지지 않아!

그러나 그것은 언어로는 이야기할 수 없는 사실을 소설이라면 갑자기 언어로 이야기하는 게 가능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내가 시사하고 싶은 점은 그것과는 반대의 것이다. ‘사건’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성격, 즉 재현되는 것의 불가능성 바로 그것을 어떻게든 이야기함으로써, 소설은 거기에서 언어로는 재현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자면 ‘사건’ 그 자체의 소재를 지시하는 게 아닐까. 만일 모든 사태가 언어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이 쓰여지지 않으면 안 될 치명적인 필요성도 없을 것이다. (63-64)

오카 마리. 김병구 역. “기억 서사”. 2004.

좋은 소설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고민한다. 언어가 완벽했다면 소설 없이도 인간은 고통과 사건, 기억을 분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언어가 완벽하지 않으므로 인간은 이야기를 나눌 방법을 실험해왔다. 언어 예술은 그 결과다. 언어 안에서 언어는 스스로를 문제삼고 다음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또한 어떤 서사는 서사화에 저항한다. 그래서 목적적으로 정리되지 않는 잉여 부분을 지시하곤 한다. 이 때 언어의 불투명성은 언어의 무기다. 기억과 증언, 분유의 가능성은 바로 그 잉여 부분에 있다. 사건을 재현할 수 없음을 통해, 일목요연한 서사화가 불가능함을 통해, 혹은 그런 정리가 옳지 않다는 감각을 통해, ‘그것/그들’의 존재가 재현된다. 이는 우리가 언어를 통해 지을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인 표정 중 하나다. 이 지점을 향해 우리는 어떻게든 이야기해야 하며, 이야기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이야기하는 ‘나’를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애도는 기만이나 위선, 심지어 폭력이 된다.

물론 쉽게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며 쉽게 기대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실패는 패배와 다르다. 나는 앞으로도 기꺼이 실패의 발자취를 쫓으려 한다.

파상
studien6180@gmail.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