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질에 관한 탐구” (1)

형상이냐 질료이냐

동일한 디자인으로, 나는 모래를 가공하여 테이블을 만들 수도 있고 철을 가공하여 할 수도 있다. 둘은 그 재료에 있어서는 차이나지만 개념적으로는 동일한 것을 구현한다. 전자를 질료라고 부르고 후자를 형상이라고 부르자. 질료는 그것을 구성하는 물리적 조건이고 형상은 그것을 구성하는 개념적 조건이다.

본질은 형상의 차원에 있다. 즉 질료 차원에서 해명될 수 없다. 대부분의 개념은 물질을 통해 예화되지만, 그 물질의 배치 자체가 어떤 개념을 예화하진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테세우스의 배를 생각해 보자. 어떤 배를 구성하는 나무판자를 야금야금 다른 배에로 옮겼다고 해도, “테세우스의 배가 다른 재료로 재구성되었다”라고 이야기할 것이지 “테세우스의 배가 부분적으로 옮겨졌다”라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아마도 본질은 원자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아주 근본적이며 총체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일 터이다. 어떤 대상의 본질을 언급할 때, 그 본질은 대상의 구성요소들의 합집합과 동일할 수 없다. 그 대상들의 관계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추상될 때에만 본질과 동일한 모임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추상은 동어반복적이다. 그 상상이 아주 구체적이고 엄밀해진다면 사실상 어떤 완결된, 본질에 관한 기술어구의 내포와 구분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질료와 형상은 실재적으로 구분distinctio realis 가능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존재로서 우선하는가? 아주 직관적인, 경험론의 방식으로는 형상이 질료에 후행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야 한다. 형상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질료들을 대면함에 따라 일반화되고 추상화된 사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반본질주의적 전통 역시 본질을 후행한다고 여긴다. 그것이 선행적인 것일 경우, (경험론 전통에서는) 검증할 수 없기에 무의미하며 (윤리적 전회를 경유하는 전통에서는) 비윤리적 함의를 갖기에 부정되는 것이 낫다.

반본질주의는 수용할 만한가? 반본질주의가 공통적으로 삼는 논거는 반본질주의가 모종의 실용적 이유에서 거부되어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이를 평가하기 위해 다음을 지표 삼아야 한다: “그것이 요구하는, “본질” 개념의 삭제가 주는 효용이 그 비용보다 큰가?” 그리고 이 평가가 가능하려면 삭제되는 본질 개념이 무엇이며, 그것의 효용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 

본질의 기능 및 그것에 관한 견해들

본질이란 무엇인가? 가장 불필요하지만 구태한 정의로는,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것”을 들 수 있겠다. 그 후보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속성이다. 하나의 개체를 다른 것과 구분하게 하는 요소는 그것이 담지하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름은 개체를 지시한다. 그런데 위치적 속성을 포함하여, 서로 다른 두 이름의 지시체가 모든 속성을 공유한다면 그 지시체는 동일하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개체본질은 특정한 속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속성으로 생각될 때, 본질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그 본질의 담지자를 다른 것과 구분되게 하는가? 우선 우연적인 속성은 본질이 될 수 없을 듯하다. 그것이 우연적이라면, 어떤 경우에 그 개체는 바로 그 속성을 갖지 못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 속성을 갖지 못한 개체를 바로 그, 본질을 갖는 개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본질은 필연적으로 어떤 개체가 담지하는 속성이어야 한다.

모든 필연적 속성은 본질인가? 그렇지 않다. 예컨대, I: “자기 자신과 동일함”, T: “존재할 경우 2+2=4인 세계에서 존재함”과 같은 것은 어떤 개체의 속성으로 기능할 수 있으면서도 본질이라고 보기 어렵다. 본질은 어떤 개체를 아주 특이하게 다른 것들과 구분해 내는 기능을 하는데, 이러한 속성들은 모든 개체에게 공유되는 필연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단순성이 문제되는 것도 아니다. T는 분명 복합적 속성이므로 그것을 본질이 될 수 있는 속성이라고 하기에 의심스러움이 있지만, I는 아주 단순하고 더 이상 분석 불가능한 속성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은 어떤 개체를 특정하는 필연적 속성이다. 어떻게 그러한 특정이 가능할까? 고전적인 관점은, 그 본질이 개체의 질료에 앞서 준비되어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 관점은 수용되기 어렵다. 그러한 본질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것이 존재함을 아는가? 본질은 우리의 의식에 현상하지 않는다. 어떤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불확정적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필연적 진리들의 세계가 아닌 우연적 사실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후설은 우리의 의식에 끝없이 괄호를 친다면 이 세계에서도 본질이 발견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이 때 의식 밖의 본질이 발견되리라고 믿기 어렵다.

현대의 대안적 관점은 개체의 기원을 본질로 간주한다. 예컨대, 어떤 것을 구성하는 재료나, 어떤 생명체를 구성하는 특정 배아에 대해, 바로 그것으로부터 발생했음이 그 개체의 본질이다. 말하자면 이는 본질이 형상이 아닌 질료적 차원에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나는 이 견해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긴다. 두 이유에서 그렇다. i) 어떤 재료에 있어서도, 그것은 그 재료를 구성하는 형상을 통해 사유된다. 따라서 기원본질주의는 무한퇴행을 함축한다. ii) “바로 그 재료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사유될 수 있다. 따라서 기원본질주의는 본질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본질이 포기될 수 있는가?

이상의 이력을 생각할 때 본질이 존재함을 방어하기 어려워 보인다. 본질을 형상의 차원에서 고찰할 경우 무엇이 본질인지 알 수 없게 되고, 질료의 차원에서 고찰할 경우 무한한 존재자들의 연쇄를 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관념론을 요청하며 후자는 (그 자체로 의심스러운) 우주론적 논변cosmological argument를 끌어들이는 듯하다. 또한 후자는 어떤 개체의 부분적 가능성만을 포함하는 듯하여, 모든 세계에 있어 그 개체를 지시해야 하는 본질의 의무를 다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본질 개념을 포기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아닌가?

일단은 본질이 갖는 실용적 의의가 있다. 어떤 개체에 대한 (특히, 반사실적) 가능성을 논할 때 사실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도 어떤 개체가 바로 그 개체일 수 있을 근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거는 무엇보다도 어떤 개체의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분간하게 한다는 실용적 의의를 갖는다. 예컨대, 본질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니가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러저러했을 것이라는 상상이 공상인지, 망상인지를 분간할 수 없다.

물론 이제까지 보기로는 이 의의에 비해 그것이 지는 비용이 과하다. 본질에 관한 인식론이 구축되기 어려워 보이며, 또 어떤 이들은 그것이 비윤리적 함의를 갖고 있다고도 말한다. 또한 심지어 본질의 효용이라는 것이 아주 의심스러워서, 본질의 정의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공상의 효용이 아닐까 하는 혐의까지 받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혐의들이 모두 참이라면 본질의 실제적 효용은 0에 수렴하며 그 비용은 막대하다. 따라서 본질은 포기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본질을 소생시킬 부단한 노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식으로든 무해한, 대안적 본질 개념을 스케치해보는 것이 어떨까? 이 스케치에는 어떻게 본질이 알려질 수 있냐는 물음에 관한 개략적 응답이 담겨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스케치가 얼마나 효용을 가지며, 반본질주의자들의 실용적 반론에 어떻에 응답할 수 있는지를 말해내야 한다. 이어서 나는 이 스케치를 그리는 데에 집중하고자 한다.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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