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포르노를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모든 준비 과정과 반복되는 움직임은 간접으로 경험하기에는 너무 지루하다. 포르노 소비의 중요한 목적 하나가 있다면 자극적으로 구성된 절정에 도달하는 일이다. 아무런 노력 없이 편안하게, 오르가즘 혹은 사출의 순간으로.

적나라한 이야기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사실 포르노에 관한 긴 글을 쓸 만큼 다양한 경험이 필자에게는 없다) 의미화와 명명, 에 대해 말하려 한다. ‘이것은 이런 뜻이다.’ ‘이것은 이러저러한 다른 것을 보여준다.’ 혹은 ‘여기에 이러한 이름을 붙이자.’ 와 같은 시도들. 물론 사태를 ‘명료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걸려들기 쉬운 함정이 하나 있다. 개념이나 이름에 잡아먹히는 순간 사유는 포르노가 된다. 언어와 범주로 사고하는 종의 숙명에 관한 이야기다. 말이라는 양날의 칼.

의미없는 일들이 있고 굳이 의미화할 필요가 없는 일들도 있다. 또 말할 수 없는 것과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말이 아닌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이 사유(철학)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직은 할 말 없다) 그리고 그것들을 말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그때 너무 성급해지면 함정에 빠진다. 빠졌다는 것도 모르고 성공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간편한 절정’을 지나가버리고 나면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며, ‘몸’이 아직 저기에 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 텍스트는 다른 둘과 긴밀하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단어들을 쓰겠지만 그 의미(혹은 층위)와 용도는 다른 결에 있다. 그러나 ‘말을 학살하고 난 뒤의 얼굴’과 ‘세계에 돌을 던지는 행위’, 그리고 ‘변질'(단현)에 관한 일종의 이어쓰기다.

Paul Mobley, ‘Marie Cassady, born Dec. 8, 1912’ (링크 이동 후 스크롤을 조금만 내려주세요)

(이미지 정보 : ‘Marie Cassady, born Dec. 8, 1912’. Paul Mobley, “If I Live to Be 100: The Wisdom of Centenarians” 연작 중. October 11, 2016, Welcome books)

이렇게 말해도 될까. 자코메티의 얼굴(몸)들은 ‘말의 학살’을 ‘말’해낸다. (보여주기를 통하여 말해낸다. 이때의 ‘말’은 비유에 가깝다. ) 불필요한 것들을 다 쳐낸듯 앙상하고 표정 없는 얼굴이 남아 있다. 자코메티는 신체가 있기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우리에게 있는 얼굴과 몸을 이야기하려 한다.

표정은 기호가 아니다. 특정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언어─개념화할 수 없으며  어떨 때는 ‘바로 저 표정’을 칭하는 이름도 붙일 수 없다. 세기를 살아낸 노파의 표정은 그런 뜻─signifié!─이 아닌 무언가를 드러낸다. 얼굴을 빌어 무엇인가가 출현하고 있다. 내 관심사는 여기다. 기호언어가 아닌 방식,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들. 그 출현의 순간.

이를테면, ‘신체는 텍스트다.’ 라는 흔한 명제가 여기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푸코가 (그리고 단현이) 지적한 단면에서 신체는 ‘권력이 작용하는 장’이다. 그리고 그 권력은 언어의 형태로 존재한다. 타당하고 유의미한 발견이다. 아름다움과 추함, 귀여움, 섹시함, 남자다움이나 여자다움 등 일련의 관념어들. 또는 ‘X라면 모름지기 Y해야지’, ‘X는 Y한 거야’ 등의 문장들. 기호들이 형성(정의)되고 그 기호들이 관련을 맺는 방식으로 문화와 관습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신체에 물리적인 힘이 가해진다. 만들어진 체계에 따라 내 몸을 가꾸고 다른 이의 몸을 판단한다. 그렇다면 신체는 ‘문화적 랑그가 출현하는 파롤’, 즉 지배적 문법을 관찰할 수 있는 사례적 텍스트다. 또 이렇게 말할 때, 그러니까 “<신체>는 <파롤(텍스트)>이다”라고 말할 때, 신체는 하나의 기호다. (‘~하는 텍스트’라는 기의를 갖는 기표가 된다) 이로써 기호로서의 텍스트─신체 가 구성된다. 신체의 텍스트성은 그 독해를 통한 문화비평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해석’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들이 남는다. 랑그에 포섭되지 않은 신체, 어쩌면 단현이 남겨둔 “고유한 신체”. 기호화─의미화하지 않는 방식의 신체. 거울에서 만나고 길거리에서 만나는, 걸어다니고 몸짓하는 바로 그 신체. 나는 단순한 고깃덩어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해석과 기입의 대상으로 전시되지 않고 출현하는 신체가 있다는 것이다. (표정은 이것이 드러나는 ‘틈’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자코메티와 달리 나는 실패할 것이다. 보여주기라는 우회도 거치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하는 쓸데없는 짓을 하려 한다. 그냥 포르노만 되지 않기를!

런던 옥스퍼드 광장. 때는 구십년대의 어느 하루.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기는 어려웠지만 아마 마흔다섯쯤 되었을까. 여인은 슈퍼마켓에서 몰래 빼낸 듯한 쇼핑 수레에 소지품을 싣고 천천히 포도를 따라 가고 있었다. 마치 아이가 실려 있는 유모차를 내려다보듯,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수레를 밀었다. 수레 속의 소지품은 비닐 봉지에 담겨 있다. 머리에 스카프를 둘렀는데 그 위로 또 털모자를 썼다. 러시아말로 샤프카라 불리는 모자였다. 털이 듬성듬성 빠진 모자였다. 누빈 윗도리에 바지, 그 위로 흙빛의 인조털 코트를 걸쳐 입고 있는 여인은, 멀리서 보면 마치 에스키모 같다. 신발만은 에스키모와 달리 미국 스타일의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가 한동안 지내셨던 핼럼가(街) 근처 뉴캐번디시 거리의 쓰레기통에서 여인이 주운 것이었다.
런던 지하철역에 새로운 설비가 들어섰다. 승객이 앉아서 기다리던 벤치들을 없애고 대신 비스듬히 서서 몸을 지탱할 수 있는 일종의 횃대 모양의 버팀대를 설치한 것이다. 노숙자들이 더 이상 벤치에 누워 잠들 수 없도록 한 탁월한 구상이었다. 여인은 이제 밤이면 역의 아스팔트에 두꺼운 판지를 깔고 옷을 입은 채 잠이 든다. 어머니도 그러셨지만, 밤이면 발이 부어 오르기 때문에 신발 끈은 느슨하게 풀어 두어야 했다.
한낮이다. 옥스퍼드 광장 너머 보행자 구역에는 비둘기들이 수백 마리씩 모여 있다. 샤프카를 쓴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비둘기들이 종종걸음으로 날아오르면서 여인 쪽으로 몰려든다. 여인은 모티머가(街)의 한 식당에서 얻어 온 묵은 빵을 검은 비닐봉지에서 꺼내더니 잘게 부수어 비둘기들을 향해 뿌려 주었다.
비둘기들이 여인의 팔 위로 날아올라 앉고 어떤 놈들은 머리 위에서 맴돌며 날았는데 대부분은 땅에 떨어진 빵 조각을 쪼아대고 있었다. 여인은 때때로 무심한 듯 부스러기 빵 조각을 자기 입으로 가져가곤 했다.
어렸을 적, 집 뒤뜰엔 새들이 멱 감을 수 있게 돌로 된 확이 놓여 있던 기억이 난다. 혹독히 추웠던 어느 겨울, 당시 지금의 저 여인 나이 또래였을 어머니는 매일 아침 은자작나무 사이로 내린 눈을 헤치고 뒤뜰로 나가, 돌확의 꽁꽁 언 물 위에 빵 조각을 놓아 두셨다. 마테를링크가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 역시 새들은 죽은 이들이 전하는 소식을 가져온다고 믿고 있었다.
여인은 새 한 마리를 손에 올려 놓더니, 머리를 흔들고 팔꿈치로 쳐내면서 다른 새들을 쫓았다. 여인이 가슴께로 올려 안은 그 새는, 털이 군데군데 빠지고 탁구공보다 좀더 작은 둥근 머리는 털이 반쯤 벗겨져 대머리가 되어 있었다. 빵 부스러기를 주었으나 받아 먹지 않았다. 여인이 다른 비닐 봉지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며 찾는다. 그것은 우유가 조금 담긴 아이 젖병이었다. 비둘기의 입을 벌리더니 부리 속으로 몇 방울 떨어뜨려 넣었다.
날마다 옥스퍼드 광장으로 오기 전, 여인은 하루도 빠짐없이 이 대머리 비둘기의 젖병을 준비했고, 다른 비둘기들에게 빵 부스러기 모이를 준 후엔 어김없이 이 대머리에게 우유를 먹였다.
옥스퍼드가(街)에 쇼핑 나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멈추어 서서 샤프카를 쓴 이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노숙자 여인이 그 대머리 새에게 말했다. 글쎄, 두터운 벽 너머에 숨겨져 있는 것을 저들이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이 풍요한 정원을 꼭 보고 싶어한다면 보도록 내버려 두지 뭐.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수록 : 존 버거, 『Photocopies』, 김우룡 역,  상지사피앤비, 2005

33-35p, 「유모차의 여인」

서술자는 여인을 관찰하고 있다. 여인은 옥스퍼드 광장에서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주는, 그 중 대머리인 비둘기에게는 젖병으로 우유를 먹이는 노숙자다. 그런데 서술자는 새가 먹을 빵을 놓아두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고, 여인에게서 어머니를 발견한다. (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 그래서 여인이 끌고 등장한 쇼핑 수레를 ‘유모차’로 은유하고 “유모차의 여인”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진정 일어난 일은 무엇인가. 이 텍스트는 기호화라는 강력한 사건이다. 여기서 여인과 그의 행위는, 혹은 옥스퍼드 광장에서 일어난 사건은, 서술자의 어머니를 의미하는 것으로 기표화했다. 말하건대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 여인에게 ‘유모차의 여인’이라는 이름을 붙여버린 바로 그 사건은 서술자 없이는 아무런 근거와 의미도 없다. 문제는 저자와 작품 분석이 아니다. (그래서 이 작업을 비평이라고 부르기에는 난점이 있다)

생각건대 이 “유모차의 여인”이라는 텍스트는 다음과 같은 작은 텍스트를 내포하고 있다.

구십년대의 어느 하루, 런던의 옥스퍼드 광장. 노숙자 차림새를 한 중년의 여인이 쇼핑 수레에 비닐 봉지를 싣고 나타났다.
여인은 비닐 봉지에서 묵은 빵을 꺼내 비둘기들에게 뿌려 줬다. 비둘기 중에 털이 듬성듬성한 것이 하나 있다. 여인은 그 비둘기에게 젖병으로 우유를 먹였다.
옥스퍼드 가에서 쇼핑하던 사람들이 그 여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인은 말했다. “글쎄, 두터운 벽 너머에 숨겨져 있는 것을 저들이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이 풍요한 정원을 꼭 보고 싶어한다면 보도록 내버려 두지 뭐.”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이것뿐이다. 그리고 이 작은 텍스트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도 기입되기 전, 그냥 거기에 있는 무엇. 단지 주체(인물이 없어도 된다)와 그의 행위만으로 이루어진 무성無聲의 세계. 말하건대 이것이야말로 텍스트의 신체 다. 행위(말)하기 전의 신체가 여기 있다. 경제적인 이유로 이를 신체─텍스트라 부르려 한다. (주의 ; 이 ‘행위’는 ‘여인의 행위’가 아니다. 이 신체─텍스트가 아직 스스로 행위(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말하건대 “유모차의 여인” 텍스트는 관찰자이며 서술자인 주체가 이 신체─텍스트를 자의적으로 기호화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는 신체─텍스트로 기술한 것 이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술자는 여인을 말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그와의 만남에는 실패했다.

그런데도 포착되지 않은 것이, ‘아직 기술되지 않은 것’이 있다.

이를테면 ‘바로 저 여인’이 ‘구십년대의 어느 하루’에 ‘옥스퍼드 광장’에서 ‘비둘기를 먹이고’ ‘저러한 말을 하’기까지의 경위. 다만 나는 인과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서사 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흔히 핍진이라고 이야기하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들의 총체. 인과가 아니라 구구절절한 핑계나 사연에 가깝다. 혹은 하나의 관점에서 서술된 역사가 아니라 가공되지 않은 사건들의 비유기적 배열에 가깝다.

고백건대 여기서부터는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저 여인을 구성하는 모든 사건들을, 그 단순한 정보들을 빠짐없이 텍스트화할 수 있다. 마치 소설을 쓰기 전에 신체─텍스트가 만들어지듯이. 이 작업을 ‘아직 기술되지 않은 것’을 더이상 물을 수 없을 때까지 진행해야 한다. 철저히 기호들과 기호의 연관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서사. 여인에 관하여 가능한 가장 완벽하게 기술한 서사.

이제 우리는 이것 전체를 동어반복이나 비유가 아닌 방식으로 기호화할 수 있는가? 즉 이것은 ‘다른 어떤 것’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 이 거대한 서사는 다른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냥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을 뿐, 더이상 기호화할 수 없다. 기호들의 연관으로 분해할 수는 있겠지만, 즉 텍스트로 구성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기호가 아니다. 기호로 구성되어 있지만 기호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종의 사고실험으로 이것을 구성해냈듯이, 이 무의미성은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규모의 문제였다면 애초에 종결없이 무한히 증식하는, 어떤 운동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 모든 것은 상태가 아니라 존재로서, 거기에 있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써낼 수 있다.

기호의 총체이지만 모든 기호화에 저항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것.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과연 그런가’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게 하는 것. 수많은 의미들로 이루어졌지만 스스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한다. 여인이 가슴께의 새에게 말을 건넬 때의 표정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로써 나 또한 실패하는 중이다.

신체를 말하기 위해 텍스트를 경유했다. 말하건대 이 모든 것은 애초의 문제─우리를 가만 바라보는 ‘몸’에 관한 이야기다.

“유모차의 여인”이라는 텍스트 : 우리는 타인의 신체를 기호화할 수 있다. 이것이 언제나 오류라는 것은 아니다. 말했다시피 그것은 어떤 비평적 논의를 가능케 한다. 단지, 그러한 방식으로 신체를 기호화하는 일이 가끔은 한계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신체(혹은 그 일부 ; 아마 금월의 특집은 저마다 신체의 ‘다른 부분’ 혹은 ‘다른 속성’을 이야기하는 셈일 것이다)가 있다는 것이다. 저 신체로 하여금 무엇을 말하게 할 수 있는가 가 아니라, 바로 저 신체는 과연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체─텍스트 : 말할 수 있는 신체는 언제나 행위하고 있다. (“유모차의 여인”의 신체─텍스트로서 ‘여인의 행위’, 즉 최소한의 사건이 먼저 있었음을 기억하자) 행위는 신체를 말할 수 있게 하는 필요조건이다. 그렇다면 처음과는 다른 의미에서, 신체는 텍스트다. 말투와 습관과 몸짓, 즉 주체의 행위들은 기호와 그 연관으로 텍스트화할 수 있다. 어쩌면 일부러 텍스트화하지 않더라도 이미 텍스트로 거기에 있다. 우리는 언어와 범주로밖에 사고할 수 없는 종種이므로. 그러니까 신체─텍스트는 단현이 이야기한 행위─신체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A하는 X”. 혹은 “X는 A한(하)다.”

그 너머 : 신체─텍스트에, 혹은 행위─신체 너머에 있는 것. 아직 기술되지 않은 것. 기호와 연관으로 구성되고 기호를 통해서밖에 사유할 수 없으나 기호의 방식으로 존재하지는 않는 거대한 이야기. 신체라는 텍스트의 등 뒤에 긴밀하게 달라붙어 있으나, 상상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로 존재하고 있으나, 통채로 기호가 될 수는 없는 그것. 말하지 않고 만나야만 하는 신체. 호명할 수 없으며 단지 출현할 뿐인 신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신체. 혹은 하나의 거대한 표정.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화자는 맹인을 만난다. 그것도 무지와 편견이 가득한 채로 만난다. 처음에 맹인은 단지 기표였던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어떤 이야기의 등장인물 정도로. 이를테면 이런 것들.

“그러니까 맹인이라는 사람이, 상상해보라, 덥수룩하게 턱수염을 기른 모습을! 맹인에다가 턱수염이라니! 어이쿠, 맙소사.”
“앞을 못 보는 사람을 내가 개인적으로 알거나 만나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팡이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검은 안경을 쓰지도 않았다. 나는 항상 맹인들에게는 검은 안경이 필수품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사람도 그런 안경을 썼으면 싶었다.”
“언젠가 나는 맹인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자기가 내뿜는 연기를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이유에서였다. 겨우 그 정도, 맹인에 대해서는 겨우 그 정도밖에는 알지 못했다.”

수록 :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김연수 역, 문학동네, 2014, 285-311p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화자는 맹인과 둘이서 TV를 보다가 의문이 생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생긴 건지 아시느냐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맹인은 잘 모르겠다며 설명해달라고 부탁한다. 화자는 말로 설명하려다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자 맹인은 펜과 종이로 무언가를 제안한다. 화자는 펜을 잡고 맹인은 화자의 손을 잡는다. 화자는 눈을 감고 자기가 그릴 수 있는 대성당을 그리기 시작한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했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들을 타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해낸 것 같아.” 그는 말했다. “한번 보게나. 어떻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렇게 눈은 감은 채로 있자고 나는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때?” 그가 물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인용자가 bold) 나는 말했다.

(같은 텍스트에서 인용)

영어 원문으로는 “It’s really something.” 나는 이 ‘something’을 다른 ‘말’로 표현하는 일을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신체가 출현하는 순간. 서로가 짓고 있는 표정을 발견하는 순간. 만남의 순간. 기호언어가 아닌 방식으로, 기호언어가 아닌 것이, …

타인의 신체를 ‘만날 때’ 우리는 ‘변질’을 겪게 된다. 의미화나 명명으로는 어떻게 해도 포착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감각할 때─기호 언어의 방식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조금씩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기호가 아니어서 랑그로 포섭할 수 없는 신체가 (혹은 신체의 그런 영역이) 거기 있다는 예감만으로도 우리는 변화를 상상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미신에 그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 ‘만남’을 더 치열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이야기 덩어리로서 출현하는 신체, 가 정말로 거기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기표화해버린’ 신체는 그 깊숙한 결을 쉽게 내보이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정 이라는 방식이다. 푸코가 이야기했듯, ‘하필 이러한 방식이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일 (「비판이란 무엇인가」) 이다. 그런 긴장이 없다면, 그런 상상력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체를 신비화하는 일일 것이다.

기호언어가 아닌 방식일 뿐, 정말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틈을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그 틈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내 몸을 열어젖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만나는 순간, “It’s really something”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다시 한 세기를 산 노인의 얼굴로 돌아가자. 나는 저 표정에 관하여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셈이다. 저 주름과 포즈와 안광이 말이 아닌 방식으로 드러내는 게 무엇인지, 엄밀히 말하여 나는 말해내지 못했고 앞으로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혹은 자코메티가 보여준 것, 그 작품의 밑바닥에 침전해 있는 ‘그것’들의 근처에도, 처음에 예감했듯, 전혀 도달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글이다. 어쩌면 포르노로 글을 열고 포르노로 글을 닫은 꼴일지도 모른다. 아니 실제로 그렇다. 이 모든 것 또한 성급한 명명에 불과하므로.

그러나 나는 실패하고 싶었다. 실패 없이는 부정조차 이룰 수가, 다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실패할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릴 것이다. 지금 내게 있는 말들을 더듬어 말이 아닌 방식을 고민하는 일. 말해낼 수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말해내려 안간힘을 쓰는 일. 그것이야말로 내 신체가 짓는 표정이다.

파상
studien61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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