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함이라는 것은 어떤 사태를 재현함이다. 그런데 그러한 재현은 객관적인 사태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태를 구성하는 보편자나 대상이 내포한다고 여겨지는 것들과 결부된, 주관적 표상이다. 그렇다면 기억은 객관화될 수 없다. 그것은 애초에 어떤 사건에 관한 주관적 해석을 동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될 것은, 기억이 어떻게 전달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어떻게 주관적인 기억을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기억에 관한 두번째 이야기.

기억의 조건

두가지 요소

일단 확실한 것은, 기억의 공유는 두 요소의 공유를 적어도 담보해야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나는 특정한 사태에 관련된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은 동일한 슬픔을 느낄 수 있지만, 만일 두 슬픔이 다른 사태를 표상하며 일어나는 슬픔이라면, 그 물리적 여건이 완전히 동일하다 하더라도 두 사람은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하나는 그 사태에 관한 해석에 관련된다. 동일한 비극적 상황에 관해 상상하는 두 사람이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 사태를 미래에 결부시키고, 다른 사람은 과거에 결부시킨다고 하자. 그렇다면 두 사람은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은 그 상황을 우습게 이해하고, 다른 사람은 그 상황에 대해 애도한다. 그렇다면 이 둘도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억의 동일성은 1) 동일한 사태에 관한 표상임 2) 사태에 관한 동일한 해석임의 두 조건을 만족시킬 때 담보된다.

동일한 해석?

한편, 적어도 2)에서는 무언가 께름칙함이 느껴진다. 하나의 사태에 관해 동일한 해석을 공유한다는 것이 기억의 조건이 될 수가 있는가? 통상적으로 우리는 어떤 사태를 표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하나의 사건을 기억한다고 하지 않는가? 오히려 해석이란 너무나 주관적이어서, 어떤 기억이 공유된다는 것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지 않는가? 사실 이 모든 의문은 몇가지 예시를 생각해 보자면 쉽게 해소되는 것들이다. 다음과 같은 대화를 생각해 보자:

(i)

A: 작년에 바다 간 거 기억나? 그 때 정말 좋았는데.
B: 좋았다고? 나는 내내 짜증났던 기억만 나는데.
C: 맞아. 물은 더럽고 해는 쨍쨍하고..
A: 뭐라고? 우리는 아마 영 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 모양이네.
(ii)

A: 세월호를 기억합시다. 잊지 말아야 할 사건입니다.
B: 그러게 말입니다. 정치적으로 사건을 이용하는 유족들 때문에 말도 아니였죠.
A: 당신은 내 말을 뭘로 듣고 있는 것이요?

이 예시는 두가지 점을 보여준다. 첫째로, 두 개인은 한 사태에 관해 같은 해석을 공유할 수 있다. B와 C가 “작년의 바다 여행”에 관해 동일한 해석을 공유하는 것이 그 예이다. 둘째로, 동일한 사태에 관한 것이어도 그것에 관한 평가에 따라 서로 다른 기억이 될 수 있다. (i)은 하나의 예시이며, 만일 그것 역시 주관적인 어떤 개인의 감상에 관한 것이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다면 (ii)를 고려해볼 수 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이 사람들은 같은 기억을 갖고 있다. (i)의 세 사람은 “작년의 바다”라는 동일한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ii)의 두 사람은 “세월호 사고”라는 동일한 사건을 기억한다. 그러나 이 역시 2)를 만족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언어적으로 재구성되지 않은 어떤 사태가 아니라, 그 사태를 특정 언어 공동체의 존재론에 따라 재구성했을 경우, 바로 그 해석을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물리적 사태에 관해 완전히 다른 해석을 갖는 두 언어 공동체의 경우, 같은 물리적 사태를 지시하는 진술을 한다고 해도 동일한 기억을 갖는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쨌던간 그러한 “언어화된 사태 진술”만을 “사태”라고 두고, 객관적 사태를 공유하는 것만으로 기억이 공유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위의 사례에서 화자들이 동일한 기억을 공유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맥락에 따라 조정될 뿐, 여전히 그 기준을 “동일한 해석을 공유함”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담화 맥락과 그 담화의 해석에 있어 어떤 맥락적 엄격함을 두느냐, 그것에 따라 기억이 공유되거나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2)는 일견 의심스럽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 조건이다. 심지어 (i)과 (ii)의 사례에서 보이듯 그것은 가능하기도 하다. 단순히 특정 시점에 실현되었던 사태의 내용을 제공하고, 그것이 같은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 기억은 공유된다.

기억의 전달

전달의 매개

기억의 전달은 언어적이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설사 모든 기억이 언어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전제를 따를 경우에도, 이미 모든 세계가 언어적으로 구성된다는 강한(또 의심스러운) 전제를 따르지 않는다면 기억의 전달은 언어적일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기억이 전달되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인 “직접경험”에 있어서, 그러한 경험이 이미 언어적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할 근거가 없다. 오히려 기억의 핵심은 (“첫 번째 이야기”에서 보았듯) 특정 사태에로의 연상 작용에 있다. 따라서 기억의 전달 역시 그러한 연상의 재현을 핵심으로 가져야 한다. 또 그 재현은 전달자의 의도와 합치해야 한다. 노란색 기름통을 보고 그 기름을 먹어 고통스러웠던 것을 연상한 내가, 옆에 앉은 단현을 공격하기 위해 그 기름을 먹여 고통스럽게 한다면, 그것은 재현된 것의 전달이지만 “기억의 전달”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기술적(descriptive) 언어는 이런 전달을 위한 강력한 도구이다. 그러나 직설적이지 않은 언어의 사용, 예컨대 은유에서도 마찬가지 강점이 있다. 기술적 방식으로 표현 불가능한 내적 감정을 은유는 듣는 이로 하여금 고양시킨다. 아예 언어가 아닐 경우에도, 예컨대 시각예술을 통해서도 은유적인 고양과 직설적인 표현이 모두 가능하다. 따라서 충분히 그 방법론을 연구함에 따라, 비언어적인 기억의 공유가 가능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는 예술이 하나의 매개가 될 수 있음을 말할 뿐, 모든 예술이 어떤 기억을 전달할 역량을 충분히 가짐을 말하지 않는다. 예술이 실제로 어떤 사태에 관한 태도를 전달할 수 있으려면, 작가의 의도가 해석자의 감상으로 그대로 전해져야 한다. 그런데 이는 그 자체로 모호한 예술의 특성상, 많은 어려움을 갖고 있다. 언어적 표현 역시 무작위적인 사용 속에서는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듯, 예술 역시 어떤 의미를 생산할 수는 있겠으나 특정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언어 모델에서도 나타난다. 이른바 “사적 언어”라고 불리는 장애물과의 대결은, 투명한 언어를 구축하려는 이들을 난항에 빠지게끔 했다. 어떻게 의미가 공유되냐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지가 이제 문제가 된다.

사적 태도

어떻게 기억의 전달을 확인할 수 있을까? 단순하게는, 그것을 언어적 공유에 위임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가 A를 B라고 이해하는지 묻고, B를 C라고 이해하는지 묻고…등등.​†​ 허나 아쉽게도 언어를 통한 공유는 그다지 완벽하지 못하다. 애초에 그 공유를 위해서는 발화자 간에 동일한 의미론이 공유된다고 해야 할텐데, 그러한 공유를 설명하려면 다시 언어를 통한 확인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한퇴행적 한계는 기억의 공유 자체가 형식적으로 검증 조건을 가질 수 없다는 취약성을 야기한다. 이른바 “사적 언어”의 가능성이다.

사적 언어에 의한 난점을 해소하는 방법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애초에 모든 세계가 언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치 헤겔의 자연처럼, 이 선택지를 택할 때 제시되는 세계상은 우리 정신과 자연이 일치하는 그러한 세계상이다. 다른 하나는, 언어는 이미 공동체적이므로 “사적 언어”는 그 자체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나는 전자의 방식은 그럴듯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콰인의 존재론적 상대성 논제가 보여주듯, 세계는 여러 존재론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동일한 자연적 사태를 두고 그것을 유심론적인 언어로도, 과학적 언어로도, 시적 언어로도 구성할 수 있다. 그 언어틀 중 어떤 것이 우리의 일상언어에 더 근본적인지를 따질 수는 있지만(그리고 오늘날은 그 근본적인 틀이 과학에 해당하는데) 그러한 틀이 유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후자를 선택하기에도 어려움이 남는다. 이 주장은 사적 “언어”가 불가능하다는 소박한 진리를 말할 뿐, 어떤 사태에 관한 사적 “태도”까지 불가능함을 말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언어적이지 않은 것, 예컨대 “이러저러한 여건에 놓였을 때 이러저러하게 행위함”과 같은 경향성의 측면에 있어, 우리는 그러한 경향성을 일종의 “사태에 관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선택지는 이런 종류의 태도에 대해 큰 말을 해주지 못한다. 모든 태도가 언어에 관한 사실은 아닌 탓이다.

태도/행위

사태에 관한 특정한 비언어적 태도가 있다. 또 우리는 그 태도를 기억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언어적으로 무언가를 기억하지 않더라도, 어떤 상황 속에 처했을 때 그 상황이 과거의 다른 상황과 아주 유사하다면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할 수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행위의 경향성을 또한 “기억”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한편, 언어적인 것으로 상정되는 그러한 태도들도 비언어적 방식으로 번역될 수 있다. 물리주의 세계관 내에서는 오히려 그 번역이 더 유용하다. “정신적인 태도”가 있어서 그러한 태도가 어떤 행위를 야기한다는 주장은 의심스러운 탓이다. 어떻게 그 번역이 가능한가? 마찬가지로 경향성을 통해 가능하다. 내가 “날이 덥다”를 믿는다는 것은, 야외에 노출될 때 얇은 옷을 입을 경향성이 크다 등으로 번역된다.

그렇다면 사실상 모든 종류의 기억은 행위 경향성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이 “기억함”의 조건을 정식화할 수 있다: “p를 기억한다는 것은, p에 대한 동일한 인지를 가지면서, 그 p가 지시하는 어떤 사태에 대해 A라는 행위 경향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행위의 공유”를 기억의 검증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겠다. 두 사람이 공히 p를 기억한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p와 관련된 어떤 사태에 대해서 A를 행위 경향성으로 갖는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전적으로 동일하게 행위한다면, 둘의 기억은 중첩된다. 약간의 차이를 갖는다면, 둘의 기억에는 어긋나는 면이 약간 존재한다…. 등등.

행위의 공유가 기억의 검증 기준이 된다면, 기억의 전달은 그러한 행위 경향성의 전달로 이해될 수 있다. 내가 모종의 방식으로 나의 기억을 표현했을 때, 내가 행동하는 바로 그 양식이 나의 표현으로 인해 상대에게서 구현된다면, 나의 기억은 그 표현에 따라 전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나의 표현으로부터 상대의 행동에 이르는 인과와, 상대의 행동을 관찰함에 따라 정당화 가능하다. 비록 그것이 기억의 “내용”이 전달되었는지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전달이 가능하며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한 그럴듯한 근거를 제공하는 셈이다.

내가 “그 날 괴한한테 얻어맞고 너무 힘들었어요”라고 말했을 때 상대가 나의 힘듦을 연상하고, 또 내가 다시 괴한을 보았을 때 했을 행위를 그가 했다면, 나의 기억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캔버스에 점 몇 개를 찍음을 통해 나는 삶의 공허함을 표현하고자 했고, 그 표현이 성공적으로 단현에게 전달되어 그가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었다면, 나의 기억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VR을 통해 특정한 사고 현장을 재현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사고 피해자들에 대한 공감을 겪게 한다면, 그 사고의 기억이 충분히 전달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대부분의 기억 전달을 동일한 틀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준은 충분히 엄격하지 못하다는 문제를 갖는다. 첫째로, “동일한 인지에 따르는”이라는 조건이 문제된다. 무엇이 두 인지를 동일하게 만드는가? 그 동일성이 어떻게 검증될 수 있는가? 또한, 동일한 인지에 따르는 동일한 행위 경향성에 있어서도 둘이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유아론적 전제를 배제한다면, 행위를 통한 기억 전달의 검증은 그나마 가장 그럴듯하다.

존재론적 가능성과 인식론적 불가능성

우리는 이상으로부터 “기억의 공유”에 얽힌 하나의 가능성과 하나의 불가능성을 보았다. 가능성은 존재론적인 맥락에 놓여 있고, 불가능성은 인식론적인 맥락에 놓여 있다. 하나의 사태에 관해, 그 사태를 기술하는 여러 방식이 있고, 그러한 기술이 성공적이어서 동일한 감상을 상대에게 불러일으킨다면, 기억은 공유될 수 있다. 그러한 공유가 검증될 수 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해보인다. 전달이 안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경우에도, 공유가 성공했음을 검증할 절차를 마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태에 관한 사적인 태도에 있어, 그 태도에 어떤 사태에 관한 것이며 어떤 해석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기 위한 절차는 무한 퇴행에 빠질 공산이 크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절차는 경향성 태도의 확인이다. 즉, 어떤 두 개인이 특정 기호/상황/인상 등을 대면했을 때 동일하게 행위한다면, 그러한 인상이 지시하는 사태에 대해 동일한 태도를 갖는다고 말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차는 충분히 엄격하지는 못하다. 이 경우에도 사적인 무언가에 의해 두 개인이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진다고 생각해봄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유아론적 결론을 배제한다면, 경향성 태도의 확인은 최선의 선택지이다.

한편 공동체의 단위에서 특정 기억을 위시한 집단적 행위가 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그 행위가 정말로 가능하다면, 우리는 “공동체적 기억”이라는 것을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은 사이비 개념처럼 보인다. 공동체에게 정신이 있다고 할 수 없는 탓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기억” 내지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은 실제로 없어야 마땅하다. 그것은 확신할 수 없는 기억에 대한 명목적 공유에 기초한 집단적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확인할 수 없음에도 어떤 “공동체의 기억”이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하나의 공동체가 어떤 특정한 집단 행위를 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기억을 공유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닐까? 그 공유의 가능성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기억으로 행위로 이어지는 모종의 실마리가 있음과, 그러한 연결이 공동체의 단위에서도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 이 두가지 직관은 별도의 주제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1. ​*​
    애초에 그러한 “지시”가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콰인의 토끼-가바가이 논증은 이러한 점을 꼬집는 듯하다.
  2. ​†​
    말하자면 “램지화”의 사적 버전일 터이다.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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