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술문은 모종의 믿음을 전달하는 매개체이다. 모든 종류의 문학은 모종의 사실들을 전달하는 매개체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나 사실이란 어떤 기억에 근거했거나, 기억 자체인 경우가 있다. 어떤 진술문이나 문학은 기억을 전달하는 수단인 셈이다. 진술이나 문학을 통해서만 기억이 전달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를 소개할 때, 그 사람의 이름이 잘 사용되기 위해서는 그의 역사적 사실이 공유되어야 한다. 예컨대 크립키는 이것을 “인과적 사슬”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여기엔 문제되는 것이 있다. 대체 “기억을 전달한다”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이 물음에는 두가지 응답이 필요하다. 일단 기억이란 무엇인가? 또 그것의 본성에 비추어볼 때, 기억의 전달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된다. 일상적으로 “기억의 전달”이라고 일컬어진 그 사건들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알려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기억 전달이 아니라면 그 모든 경험은 무엇이었는가?

따라서 진술문과 문학, 소개 행위 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두 질문에 답해야 한다. 첫째, 기억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기억이 가능한가. 둘째, 기억이란 어떻게 전달될 수 있는가. 특히, 첫째 질문에 답하며 밝혀진 기억의 본성이라는 것이 그것 또는 그 내용의 “전달”이라는 개념을 가능하게끔 하는가. 애초에 그러한 전달이 기억의 개념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말하자면 이것이 나의 “다음 발걸음”으로 예비된 셈이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알아차렸을 것인데, 사실 이 주제는 “다음” 발걸음이라고 하기에는 구태한 면이 있다. 크립키 등을 운운하며 공동체에 새로운 이름을 가져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은 <지평>의 첫 기획에서 다루었고, 문학이 어떤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은 <트리플렛>의 직전 기획에서 이야기한 과제였다. 하지만 구태한 것은 주제일 뿐이다. 실제로 문제가 된 것은 두 기획에서 초점을 맞춘 문제와는 상이하다.


기억에 관한 첫번째 이야기.

기억이란 무엇인가?

기억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답하는 것은 쉽다. 기억은 실현되었던 사태의 표상 행위이다. 그렇다면 이 때 어떤 것이 표상되는가? 표면적으로는, 앞선 응답이 말하는 그대로 “실현되었던 사태”가 표상된다. 사태라는 구태한 개념이 돌아왔다. 사태란 무엇인가? 사물들이 놓여 있는 상태이다. 사태란 어떤 의의를 갖는가? 모든 사건은 어떤 사태가 시공간적으로 어떤 곳에 실현됨이다. 즉 사태는 사건의 내용이다.

사건은 인식 독립적이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인식 의존적이라면 유아론적 함축을 지닐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세계에 발생하는 것이 언어나 개념, 지식에 의존할 것인데 이러한 것들은 이성의 세계에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 개인에 관한 유아론이 아니더라도, 여튼간 사건의 인식 의존성을 전제할 때 나오는 것은 개인 또는 집단의 유아론이다. 그런데 유아론은 좋은 존재론적 응답이 아닌 것 같으며, 따라서 사건은 인식 독립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야 할 것 같다.

사건이 인식 독립적이므로 사태 역시 인식 독립적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인간의 개념 틀과 독립적인, 아주 객관화된 형태로 존재해야 할 것 같다. 또 오늘날 일상적 실재론은 물리적 존재자를 가장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기초적 존재자로 간주한다. 따라서 사태는 객관적이고, 그 사태는 다름 아닌 물리적 존재자들의 배치이다. 전통철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질료”이다.

앞서 기억을 “실현되었던 사태의 표상”으로 정의했다. 이 정의가 타당하고 사태에 관한 이상의 고찰이 참이라면 기억은 오로지 객관적인 사태의 재현 행위이다. 즉 물리적 존재자들의 배치에 관한 재현 행위이다. 이러한 이해가 맞다면 “4월을 기억한다”가 의미하는 바는, 혁명의 현장에 실현되었던 어떤 물리적 배치들을 마음에 재현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응답은 기억에 관한 우리의 통념에 크게 어긋난다. 그래서 우선은 이렇게 답하게 된다: “기억은 사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관한 것이다.” 즉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참인 명제를 이해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 역시 기억을 오도하는 주장이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어떤 사건의 현장을 재현하고자 한다. 이는 단순히 어떤 명제를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따르는 응답은 “기억은 사건에 관한 것이다”이다. 이 응답도 만족스럽지 않아 보인다. 사건은 특정한 점 위에 있다. 따라서 사건은 재현 불가능한 것이다. 기억이든 믿음이든 그 주체는 그가 발견하고자 하는 사건과 다른 시공간적 점 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 기억되려면 그 때 표상되는 대상은 사태여야 한다. 하지만 기억이 표상하는 대상이 사태라고 할 때 생기는 문제를 이미 말했지 않은가? 기억에 관한 통념이 바뀌어야 할 것인가? 또는, 어떤 우회로를 찾을 수 있을까?

형상 없이 질료가 고찰될 수 있는가?

객관적 기술이란 무엇인가

내가 경유하려는 우회로는 “사태의 표상”의 개념을 검토하는 것이다. 일단 표상이라는 것은 모종의 명제에 관한 태도이다. 이 명제는 사태가 실현되었을 때 참이 되는, 바로 그 사태에 관한 기술이다. 그러므로 사태의 표상이라는 것은 객관적 사태에 관한 기술에의 태도이다. 즉 우리가 사태를 표상할 때는 그 사태가 실현되었을 때 참이 될 명제에 관한 태도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 표상이 “오로지 객관적”인 방식을 취한다고 말해지려면 다음 조건을 만족해야 할 것 같다:

  1. 그 명제가 주관 독립적인 대상들에 관한 기술이다.
  2. 그 대상들은 주관 독립적인 방식으로만 기술된다.
  3. 그 명제가 인식 독립적으로 참일 수 있다.

1은 대상이, 2는 기술 방식이, 3은 진리 조건이 객관적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의식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피한 존재자라면 그것은 (강한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기술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러한 기술의 표상은 객관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콰인의 ‘가바가이’ 논증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점이 따라 나온다. 같은 이유로 2와 3이 따라나온다. 특히 3은, 그것이 하나의 가능한 사태를 지시해야 함을 말한다.

셋 중 하나라도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기술은 주관적 존재자나 속성에 관련되거나, 가능한 사태에 관한 기술이 아니다. 따라서 1-3은 객관적 기술의 충분조건이다. 한편 이 셋이 모두 참이라면 그러한 기술은 객관적으로 표상된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따라서 1-3은 객관적 기술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일단 앞서 사태에 관한 기술임을 전제했으므로, 그리고 사태란 객관적 존재자임을 간주했으므로 1은 만족된다. 한편 3에 있어서도, 우리가 어떤 사태를 모순되게 표상하지 않는 이상 조건은 만족될 것으로 보인다. 남은 것은 따라서 두번째 조건 뿐이다. 사태에 관한 표상은 주관 독립적일 수 있을까?

나는 면식에 관한 러셀의 이론을 지지한다. 면식지는 직접 경험한 것들에 관한 앎이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면식적으로만 아는 것은 (i) 직접 지각되는 대상들(즉, 논리적 이름의 지시체들), (ii) 가장 단순한 보편자들, (iii) 순수히 주관적인 느낌들 등이다. (iii)은 (그것이 존재하는가와 별개로) 면식지의 정의상 면식적으로만 알려질 것이다. (i) 역시 정의상 자명하다. 따라서 (i)과 (iii)은 불가피하다.

의심스럽게 남는 것은 (ii)이다. 보편자를 어떻게 면식적으로 아는가? 예컨대, 우리는 ‘의자’가 지시하는 객관적 보편자와 면식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당연히 러셀이 말하는 것도 이러한 것과는 다르다. 감각 경험을 매개하는 가장 단순한 성질들, 예컨대 색채 등에 대해, 그 보편자와 면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면식 관계를 가진 그것이 반복되어 존재자들에게 담지될 때 그것은 실재한다. 다른 속성들은 이러한 보편자를 지시하는 술어구들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i)-(iii)은 모두 면식에 의해 알려진다.

이 경우 (iii)은 객관적인 무언가라고 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대상과 속성이 객관적이면서 정당하게 알려지는 것들인가? 그렇지도 않다. (ii)는 가장 단순한 속성들이다. “의자임”과 같은 것은 직접 지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속성을 이해하는가? 이것이 첫번째 문제이다. (i) 역시 직접 지각 가능한 대상들이다. 무엇이 여기에 해당하는가? 말 그대로 가장 단순하게 표상되는 존재자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상들을 그것의 담지자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담지하는 속성들의 다발로서 지각하고, 이로부터 그 대상을 이해하지 않는가? 이것이 두번째 문제이다.

이 문제들을 고려할 때 불가피해지는 것이 그의 “기술구주의”이다. 그가 보기에, 일상적 사물의 이름(일상적 고유명)이나 복합적인 속성은 여러 기술구들의 연언으로 분해될 수 있고, 분해되어야만 그것들이 사용된 진술의 논리적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기술구가 어떻게 대응되는가? 발화 주체가 어떤 데에 초점을 맞추어 그를 이해하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일상적 대상에 있어 그것들은 순수히 주관적으로 표상된다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명제의 참은 사실과의 대응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명제 태도로 사태를 본다는 것은 사태와 사실의 연관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즉, 사태의 표상이 객관적일 수 있냐는 것은 어떤 사실에의 태도가 객관화될 수 있냐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후에는 사건과 명제 뿐 아니라 사실, 그리고 명제의 표현으로서 진술까지도 논의의 대상에 포함될 것이다.

객관적 기술이란 가능한가

(i)-(iii)이 모두 면식적으로 알려진다고 하자. 그렇다면 객관적 기술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이는 객관화될 수 있는 사태가 존재하냐는 물음과는 별개이다. 러셀의 면식 이론이 참이라면, 어떤 경험적 사실에 관한 기술도 객관적인 표현들로만 구성될 수 없다. 기껏해야 우리는 수학적 명제 등을 진술할 때에나 객관적인 진술을 할 수 있을 터이다.

이런 종류의 객관적 기술은 물론 허용된다. 세계가 모두 양화 가능한 입자들로만 이루어졌다고 하자. 그리고 그 입자들이 1과 0 중 하나의 값만을 갖는다고 하고, 모든 입자들을 그 공간적 위치에 따라 줄지을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특정 사태에 대해 “1011…001이다”라고 진술하는 것은 객관적인 기술만을 사용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는 가장 단순한 속성을 지시하는 술어 F와 G, 그리고 n개의 논리적 이름을 이용하여 “F1G2F3F4…Gn-2Gn-1Fn이다”라고 말한 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진술은 가정된 “객관적 기술”이 맞기나 한가? 이러한 기술은 우리가 그 물리적 사태를 표상할 때 지향하는 명제와는 영 다른 것 같다. 기억에 관련되는 사실은 어떤 사건에 관한 의미 있는 진술이어야 할 것 같은데, “1011…001이다”라는 진술은 그저 원자들의 배열이 이러저러하다는 정보를 제공할 뿐, 어떤 실질적인 의미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태를 표상하는 것은 객관적일 수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의미 있는 기술에는 주관적인 내포가 존재하고 어떤 개별자도 직접적으로 알려질 수 없는데, 사태의 표상은 특정한 명제에 관한 태도이며, 그 명제는 가장 단순화된 사태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편화된 형상만이 논리적으로 선행하는가?

추상적 개별자 ⎯ 하나의 응답

객관적 기술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해 가능한 응답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을 ‘형상eidos’이라고 부르든 ‘보편자universals’라고 부르든 ‘유형type’이라고 부르든 ‘속성property’라고 부르든, 여하간 그런 것은 다수에게 분유하는 단일한 것이 아닌 각 개별자에게 파편화되어있는 이른바 “추상적 개별자”라는 것이다. 오늘날 ‘트롭trope 이론’이라고 불리는 형이상학적 갈래는 이러한 관점을 갖고 있다.

추상적 개별자라는 말로는 잘 와닿지 않는데, 다음과 같은 예시로 생각해 보자. 두 동일한 기종의 아이폰이 있다. 두 아이폰은 각각의 구성요소를 갖고, 대응되는 구성요소마다 또한 완벽히 닮아 있다. 각 아이폰과 그 구성요소 각각에는 이름이 붙을 수 있으며, 오로지 그것을 개별자에게 고유명을 명명하듯 할 수 있다. 이러한 명명은 아마도 그 개별자에 대한 면식 가능성을 함축할 것이다.

이제 이 이후의 단계에서, 트롭 이론가들은 “아이폰임”이라는 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폰1과 아이폰2라는 추상적 개별자가 있다고 말한다. “전원버튼임”이 있는 것이 아닌 아이폰1-전원버튼과 아이폰2-전원버튼이 있다. “터치스크린임”이 있는 것이 아닌 아이폰1-터치스크린과 아이폰2-터치스크린이 있다. 이렇게 하나의 존재자가 여러 추상적 개별자로 구성되어 하나의 개별자를 다시 이룬다.

아이폰2-전원버튼이 갖는 추상적 특징은 아이폰1의 요소로 “예화”될 수 없다. 단지 아이폰1의 요소인 아이폰1-전원버튼과 그것이 아주 닮아 있을 뿐이다. 물론 그럼에도 아이폰1-전원버튼이라는 추상적 존재자는 아이폰2-전원버튼이라는 그것과 구별된다. 여전히 트롭은 개별자로서, 다른 개별자와 수적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두 전원버튼을 모두 술어 “전원버튼이다”로 수식할 때 참이라고 알지 않는가? 트롭 이론의 응답은, 술어의 지시체가 속성이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술어는 단지 유사한 트롭들의 집합에 대해, “그 집합의 원소를 요소로 가진다”라는 의미를 가지 뿐이다.

트롭 이론가들이 염두에 두진 않았겠지만, 이러한 관점을 취한다면 사실은 객관적으로 다시 환원될 수 있을 것 같다. “의자임”에 대해 알 수는 없지만 “a-의자임”에 대해서는 알 수 있고, 그것은 개별자에 관한 앎이다. 그것은 개별자이므로 주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술어는 개별자들로 구성되므로 불필요한 내포 없이도 표상될 수 있다. 또한 그렇다면 표상된 바는 객관적으로 세계에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표상된 것과 개별적인 것이 마찬가지로 추상체이며, 표상한 바 역시 개별자에 관한 표상이었기 때문이다.

추상적 개별자는 형상을 대체할 수 있는가?

이러한 개별자들로 형상의 개념을 대체할 수 있을까? 형상, 보편자, 속성 등등의 개념이 형이상학에서 벗겨지지 않는 근거는 이른바 “속성 일치 현상”의 해명에 있다. 속성의 일치라는 말이 싫다면 ‘유사성의 경험’이나 ‘반복’ 내지 들뢰즈 풍의 표현으로 ‘차이 나는 반복’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여하간 우리는 어떤 개별자들 사이에 공통되는 현상을 발견하고, 그 현상의 근거로서 보편적인 특성을 상정한다.

추상적 개별자가 이러한 보편성을 설명할 수 있다면, 이는 보편자의 개념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추상적 개별자를 주장하는 이들도 이러한 대체를 원하기에, 다음과 같은 해명을 시도하려 한다. 속성 일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두 속성이, 예컨대 “아이폰1-버튼임”과 “아이폰2-버튼임”이 아주 유사하게 보일 뿐이다. 마치 아이폰1과 아이폰2라는 두 대상이 아주 유사한 것처럼 말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 설명은 궁색하다. 두 이유에서 그렇다. 우선 두 구체적 개체가 유사하다는 것이 순환적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또한 여전히 두 추상적 개별자가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형이상학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느냐는 혐의가 있다.

첫번째 문제를 상세히 말하자면 이렇다. 속성이 가정된 것은 두 구체적 존재자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두 존재자는 특정한 부분에 있어 유사하다. 그렇다면 그 부분이 속성이라는 상위 단계에서 일치한다고 보자는 것이 실재론의 논리이다. 그런데 “두 구체적 개체가 유사한 것처럼 두 추상적 개체가 유사하다”라고 한다면, 앞의 항이 “속성”을 포함하는 와중에 그것을 대체하는 개념인 “추상적 개체”의 기능이 설명되는 것이므로 순환 내지 역설에 빠진다.

두번째 문제는 이렇다. 어찌되었건 빨간색임의 일치가 경험된다. 그것이 트롭의 단계에서는 유사성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그러한 유사성의 관계로 여러 트롭이 매개될 수 있다면, “유사성” 자체가 하나의 보편자가 되어야 한다. 다시 트롭 이론가는 한 발짝 나아가 유사성 역시 개별적 유사성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 경우 각 유사성을 유사하게 만드는 기준이 무엇인가? 따라서 유사성에 근거한 변론은 무한퇴행적이거나 자기지시적이다.

마이클 루에 따르면 트롭 이론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반론은, 하나의 속성 집합이 너무나 정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빨간색임”을 보편자로 간주함을 통해 이후의 유사한 사례들을 모두 빨간 것의 사례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트롭 이론가들은 현존하는 빨간 것의 사례들이 빨간색 집합을 구성한다고 함으로써 새로운 빨간색 사례들이 빨간색 집합의 원소로 편입되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역시 트롭 이론은 보편자 일치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지표적, 또는 실존적 재현과 기억

우회로를 걸어 오며 발견된 것은 이렇다. 주관적 표상이 불가피하다. 어떤 사태에의 의미 있는 표상은 필히 기술구로 분해 가능한 내포를 지닌 존재자들에 관한 명제에의 태도인데, 그렇다면 이는 주관적 표상이 된다. 그 기술구를 구성하는 보편자들이 추상적 개별자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러한 주장은 내재적으로 모호함 또는 모순을 지니는 것 같다. 그러므로 대상을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데에서 오는 주관적 표상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사태에의 표상이 주관적 표상이라는 주장이 어떤 의의를 갖는가. 이것을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 가장 결정적인 의의는, 어떤 사태를 표상함에 있어서도 주관적 대응이 일어난다는 점인 듯하다. 예컨대, 타노스의 장갑이 빨간색인 사태를 상상할 때 우리는 사과라든지, 나의 아이패드 케이스라든지, 마이클 루의 <형이상학 강의> 표지이든지 그것이 예화한 빨간색으로 타노스의 장갑을 상상한다. 타노스의 엉덩이의 말랑함을 상상할 때 우리는 어제 만난 강아지의 발이 예화한 말랑임을 상상한다. 이것이 주관적 표상을 주관적이게끔 한다.

그런데 주관적 표상은 단지 사실로의 해석만을 갖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 표상에 있어 판단이나 가치평가가 내재된 채 그것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주체(s)와 사태(c)를 두 항으로 갖는 명제가 내포된 표상을 겪을 것이다.예컨대, “나는 그 불쾌한 사건을 기억한다”라는 말은 어떤 사건에 관한 표상이, c에 대해 s가 부여하는 불쾌함의 평가를 내포함을 의미하는 것 같다.

“애처로움”은 어떨까? 이 경우에는 c가 아닌, 그 c를 구성하는 어떤 개체(o)가 대상이 되며 o가 c에 속함이 전제되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는 c를 표상할 때 o에 관한 표상이 동반되는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태 자체에 관해서도 이러한 속성을 부과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세월호 사건에 관련된 어떤 o도 표상할 수 없으면서도 “세월호 사건은 안타까운 일이었다”라고 말하며 그 사건을 표상할 수 있다.

이는 단지 어떤 사태를 표상함에 있어서도 그 사태에 관한 가치평가가 내포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그 평가라는 것은 주관적으로 이해된 사태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즉 어떤 사태 자체가 갖는 속성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태를 모종의 가치적 속성과 연관시킨 주관성에 기인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주관적 표상이라는 것이 사태에 부과하는 유의미성과 가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로부터 기억의 주관성에 관해서, 그리고 그것이 어떤 가치를 내포할 수 있다는 점에 관해서는 이해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기억이 주관적인 표상을 전제한다면, 그것의 전달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기억은 어떤 계기들을 통해 나누어진다고 간주된다. 예컨대 문학이나 증언, 영상 자료 등을 통해, 기억 자체를 얻지는 못하더라도, 모종의 전달을 꾀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고찰한 바가 맞다면 기억은 아주 주관적인 방식으로 표상된다. 그러한 기억이 어떻게 다른 이의 머리 속에서 재현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남아 있는 질문이다.

따라서 곧 다가올 두번째 이야기는 기억의 전달에 관한 것이다. 기억의 전달이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아주 주관적인, 지표적 재현이라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그리고 아직 남은 질문으로서, 그러한 재현과 행위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잠정적으로 행위의 문제를 닫아두면서, 우리는 기억의 전달의 문제로 나가갈 것이다. 그리고 그 결론에서 행위의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을 기대해 보자.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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