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 철학의 시대 이후에도 변치 않는 자유와 학문의 본질을 소묘하며-

모든 ‘위대한’ 입장들이, 행동을 정초하는 이념과 그 이념을 발판삼아 도약하는 실천 간의 역동적 관계로 대별될 수 있다는 주장은 아직도 유효한 것 같다. 그것은 변치 않는 자유와 학문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혹시 (1)어떤 입장이 거대한 이념의 구축에만 전념하거나 거꾸로 (2)이념에 종속되지 않는 즉각적인 행동이나 실재에 경도되었을 때조차도, 그것은 다시금 이념과 실천의 탁월한 연합을 제시하는 후대의 이론에 흡수-변형됨으로써 ‘위대한’ 입장에 봉사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이정표가 되어주는 수많은 입장들은 이렇듯 서로 봉사하는 기묘한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의미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삼라만상의 본질이 그 소여를 의심받는 지금, 철학 그 자체의 불가능성이 진지하게 주류 철학(이 말조차도 지금은 어떤 ‘순진함’의 표현으로 취급되고 있다)에서 다뤄지는 지금 이 시대에 상기한 ‘자유의 본질로서의 이념-실천 도식’은 아무런 정당화도 제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혹여나 이 주장의 정당화가 가능한들, 그 누가 순수 이념, 혹은 순수 실천적인 철학의 시도를 막을 수 있겠는가? 이념과 실천의 역동적 연합만이 위대한 입장이 될 수 있다는 말은 폭력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른바 “경험론자”들이 단 한번도 해체 철학의 기수들에게 진지하게 대우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이념의 정립도 경험론자에겐 반갑지 않다. 이념Idea보다는 개념concept, 사유보다는 감각, 멈춤보다는 실천이라는 그들의 표어는 현대인들에게는 익숙하고 매우 그럴듯하다는 인상을 준다. 우리는 자칫 해체를 위시한 현대 철학의 목표를 근대 경험론의 그것에 연상시키고는 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해체 철학의 주인공들은 (이 주인공이 하이데거든, 데리다든, 들뢰즈든, 베르그송이든) “순수 실천, 순수 경험, 일상 그 자체”를 외치는 경험주의적 이상에 힘찬 조소嘲笑를 날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경험론자들)은 오해되었기 때문에 진지하게 다뤄지지 못한 것이 아니다. 해체의 기수들은 누구보다 그들의 본질을 명확히 파악했기 때문에, 경험론의 강력한 마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적당한 익살꾼, 혹은 훼방꾼의 위치에 위치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판단은 더 없을 정도로 적절했다. 경험론자들을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 자체는 진지하게 할 일이 되지 못한다는 데리다의 비웃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그나마 경험론자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자신의 사유에 도입했다고 할 만한 사상가는 들뢰즈이다. 그러나 그는 천대받아온 경험주의의 철학사적 위치를 환기하면서도, 철저한 이념적 정립을 수행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차이와 반복>에서 보여준다. 이념은 자유로운 생성, 즉 들뢰즈 철학의 목표인 “미친 생성”을 위한 밑바탕이 된다. 들뢰즈 사유의 예봉은 경험주의적 전통과의 제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험론과의 제휴는 이념을 등에 업고 무한히 질주하기 위한, ‘이념적 실천’의 소여로서만 차이 철학에 봉사할 수 있다. 경험과 실천은 오로지 이념이 사전에 깔아 놓은 강도적 지평, 현행적 본질의 광활한 평면 위에서만 그 속도와 깊이를 발휘할 수 있다. 이념 없이 홀로 수행되는 순수한 생성(혹은 실천)은 미쳤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것은 만용이고 방종이다. 그러나 “미친 생성”은, 전혀 ‘미치지 않았다’. 그것은 이념의 차원에서 주체가 멈추고 생각하게끔 닦달하며, 실천의 차원에서는 주체를 끝없이 내달리게 만든다. 이념을 등에 업고 달리는 주체의 행보는 방황이 아니라 여행에 가깝다. 그것은 잠재적인 이념을 함축하는 동시에 바깥으로 펼쳐내는 “광활한 깊이”, 혹은 “내재성의 평면”이다. 왕관을 쓴 무정부주의, 머리가 없는 맨몸. 이것이 자유와 생성의 철학자라고 불린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의 후반부에서 “훈육”, 혹은 “교육”이라는 말까지 써가며 일면 교조적인 표현을 보여주는 이유다. 그것은 교조적인 것이 아니라 계도적인 것이다. 들뢰즈가 자신의 차이 철학을 이념-실천의 이토록 완벽한 상보적 도식으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해체 철학의 선구자들의 공통적인 목표였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규정이나 데리다의 ‘글쓰기의 일반 과학’이 그렇다. 심지어 우리는 고전적이라는 수사를 붙이는 먼 옛날의 철학자들에게서도 이념-실천 도식이 그들 입장의 심장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에크하르트, 스피노자, 칸트, 헤겔, 딜타이, 후설의 철학은 언제든 상기한 도식과의 관련성 아래에서 새롭게 읽힐 수 있는 것들이다. 순수 이념으로서 존재하는 사유의 도식과, 그 도식을 통해 자유의 근거를 얻은 실천. 해체의 기수들이 도출한 자유는 방종 아닌 순종, 종속 아닌 해방의 면모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경험론자들은 절대 찬성할 수 없고 다만 간접적으로 봉사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 자유인 것이다.

 우리가 이념과 짝을 맞춰 전진하는 실천의 의미를 충분히 소묘했다면, 해체 철학의 시대 이후로 학문의 본질이 변했다거나, 혹은 원래 그런 본질 같은 것은 없었다거나 하는 말들은 더 없이 상투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니체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그는 지나치게 혁신적이면서도, 누구보다 억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니체는 어떤 이념에도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춤을 추는 철학, 순수한 몸짓들의 실천을 꿈꾼다. 그러나 데리다가 말하듯이, “글은 앉아서 쓸 수밖에 없다”. 춤추면서 글을 쓰는 사람의 포즈는 외설일 뿐이다. 탄생은 실은 광란의 축제가 아니라 무덤 속에 ‘먼저’ 있다. 그 무덤은 실천을 계도해줄 텅 빈 형식, 즉 순수사유의 이념이다. 일단 멈춰야 한다. 위대한 입장들이 늘 그랬듯, 탁월한 이념을 벼려내는 작업은 긴 기다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기다림은 의미 있는 실천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다.

“멈춰라, 생각해라”라는 지젝의 유명한 말에는 다음 두 마디가 빠져 있는 것 같다. “멈춰라, 생각해라. 그제서야 실천하라. 그 실천이 무위에 그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하니
marks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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