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삶 / 이야기)

삶은 이야기가 아니다. 삶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삶은 이야기 — ‘일화’의 뜻으로든 ‘서사 (구조)’의 뜻으로든 — 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삶은 차라리 기억하는 일과 기다리는 일로 이루여져 있다.

2. (글쓰기)

만약 누군가가 글쓰기를 그만 둘 수 없다면, 글쓰기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느낀다면, 그 글쓰기는 분명 논증하고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또한, 흔히 오해되는 것과 달리, 그 글쓰기는 이미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흐르는 이 세계 속에 하나의 이야기를 더하기기 위한 것도 아니어야 한다. 글쓰기가 겨냥하는 것은, 자기를 표현하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풀어놓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가 아니다.

3. (삶 / 이야기)

이야기는 삶의 모방도 묘사도 아니다. ‘삶’이라는 ‘원형’이 있고, 이야기는 그것과 닮게 그려진 ‘그림’인 것이 아니다. 이야기는 차라리 관념, 판단, 가치…와 같은 것들 옆에 있다. 대개 이야기란 작동하는 것의 이름이며, 교훈을 주기 위해, 쉽게 판단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다.

실제적인 삶은 이야기(서사적 발화) 속에서라기 보다 내밀한 인터뷰 속에서, 증언들, 되살려진 기억들 속에서, 르포타주reportage 속에서 엿보인다. 타인의 생에 닿고자 하는 글쓰기는, 사실들의 중첩 속에서 문체(스타일)가 솟아나게 되는 그런 작업에서 가능해지는 게 아닐까?

4. (글쓰기, 나)

나는 서사가 주도적으로 문장과 그 다음 문장을 이끄는 글을 잘 읽지 못하겠다. 내가 매혹된 책들은 무엇보다도 문장이 아름답고 뛰어났다. (뒤라스, 모디아노에게 공쿠르 상을 안겨준 작품이 기발한 서사를 갖고 있는 소설이었던가. 밴빌의 소설은 ‘소설 속에 이야기가 없다’는 평까지 받았으나 몇 번이고 읽어도 감탄을 자아내지 않은가.) 어떤 소설들, 어떤 책들은 바로 그 한 문장에 다다르기 위해 여기까지 문장에 문장을 쌓아올려 온 것 같다. 어떤 책들은 무심코 지나가듯 던진 한 문장이 아프고 아름다워서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진다. 문장이 아름답다는 것은 간결하다는 뜻도, 의미가 잘 전해진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그 문장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겨누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한 문장이 정확하기 위해서는 다름아닌 바로 그 자리에 들어가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앞의, 그 뒤의 문장들이 정확해야 한다. 쌓아올린 문장들 속에서가 아니라면, “그해 여름은 소냐의 여름이었다.”(유디트 헤르만, 「소냐」, 『여름 별장, 그 후』)라는 문장은 아무것도 아니다. 문장들 속에서, 이 문장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 문장들의 관계가 오직 서사로만 묶여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서사는 문장들이 지금 보는 것과 같은 그런 정렬을 할 수 있게 하는 여러 조건들 중 한 조건일 것이다. 문장들이 모여서 보여주는 것은 서사뿐만이 아니다. 서사적 논리의 나머지 부분, 문장들을 엮어주는 관계의 선들을 들어내고 난 잔여물. ‘무시무시한 감동’과 같은 수식이 여전히 허황된 말이 아니라면, 그러한 ‘감동’은 아마도 이 나머지와 마주하는 데에서 오는 게 아닐까. 그것을 본 사람은 이제 이 문장을 정말로 느낄 수 있다. “지금은 그 밤들이 내게 아주 소중했음이, 그리고 이제는 그것을 잃어버렸음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같은 단편)

그러므로 문장이 눈부시게 빛나는 순간은, 그 문장이 그럴 듯한 사변적 단언들을 담았을 때가 아니라 문장이 성큼성큼 혹은 살금살금 걸어나가다가 이윽고 시간이 멈춘 듯한 어떤 장면에 다다랐을 때, 맞닥뜨린 상황이 장면으로 펼쳐질 때, 바로 그 순간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 역시, 독특한 소재, 기발한 반전, 흡입력 있는 줄거리와는 수십 광년쯤 떨어져 있는 사람인 것 같다. 나는 산문의 아름다움을 믿는다. 그러나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잘 하지 못한다. 그리고 갈수록,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서사가 중심이 된, 전통적인 의미의 소설/픽션이 아니라는 생각에 확신이 더해진다.

5. (삶 / 이야기)

이야기 또한 작동하는 것의 이름이 되었다. 삶을 닮은 것이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오려내어 간단히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기 위해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부한 서사들이 우리 삶을 옭아매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여전히 반복된 사건을 생상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연애’를 ‘한다’고 생각한 그 모든 순간 이제는 더욱 더 빠르고 과다하게 몰아치는, 수많은 ‘연애 서사’들을 따라한 게 아니었는가. ‘고달픈 가장 서사’, ‘꽃뱀 서사’ 없이 우리 사회와 오늘 우리의 삶, 우리의 두려움과 욕망이 있을 수 있는가.

좋다. 그렇다면 문학은, 문학의 ‘이야기’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범람하는 이야기들의 연옥 속에서 문학이 하나의 이야기를 지어 얹어 놓는 것이 어떤 소용이 있는가. 여전히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서술하는 일이 필요하다면 왜 그런가.

적어도 이렇게는 말해둘 수 있는 게 아닐까. 억압적인 것은 상투적이기 마련이다. 상투적인 것은 결국 억압적게 된다. 글쓰기는 상투적고 억압적인 것에 대한 반대이자 그 반함을 실제로 보여주는 일이다.

6. (문학, 글쓰기)

문학의 글쓰기는 이야기로 독자를 유인하여 이야기가 아닌 다른 것과 마주하게 한다. 이야기로 정리될 수 없는 서술.

삶에서의 어떤 진실의 한 부분은, 이야기가 아닌 문체에서 드러난다. 문제적인 것을 말하는 가장 뛰어난 경지는 문체적인 것으로서 보여주기이다.

“글만이 침묵을 지키면서 말하는 유일한 방법”(파스칼 키냐르,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이라고 키냐르는 썼다.

문학의 글쓰기는 그 어떤 목적도 없는 글쓰기, 다만 잊지 않기 위한 글쓰기이다.

“글쓰기의 형식은 많고 많다. 하지만 오직 문학적인 글쓰기에서만이 사실을 등록하고 탐구하는 것을 넘어 재건하려는 노력이 그 관건으로 대두한다.”(W. G. 제발트, 「재건 시도」, 『캄포 산토』)라고 제발트는 썼다.

7. (작가, 글쓰기, 기억하기)

작가는 어떤 한 물음 혹은 문제의 느낌에 사로잡힌 자이다. 그 물음을 작가 스스로가 간단하고 명료하게 제시할 수 있느냐, 자신도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서 그저 느끼고 있느냐는 작가에 따라 다르다. 사실, 물음을 찾아내고 정식화하는 것은 평론가적 욕망이 하는 일이다. 아마도 작가는 물음을 확신하는 것, 집요하게 느끼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작가는 쓴다는 것에 충실함으로써 물음을 사유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알기 위해 쓴다. 작가는 그 물음을 지탱하기 위해, 그 물음 앞에 적어도 비겁하지 않기 위해,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글쓰기의 본령은 기억하는 것이다. 쓴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이다. 3인칭의 전지적 시점과 같은, 소설을 위해 마련된 작위적인 시점은 기억하는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오로지 상상과 허구의 떠벌거림일 수밖에 없는 글쓰기이다. 나는 글쓰기가 회상하는 일, 되살리는 일, 허투루 해서는 안 될 것들을 여기, 우리 곁으로 불러들이는 일, 기억들, 사건들, 진실들 — 일어난 것들이 도대체 어떻게 일어났는지 — 을 간직하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고 믿는다.

8. (글쓰기, 기억하기, 애도하기)

사랑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한다는 것, 애도한다는 것은 타자에 닿기 위해 몸부림치는 일이다. 동시에 나 스스로가 먹히지 않도로 애쓰는 일이다. 타인들 속에서, 살해당한 사람들 속에서, 다친 사람들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속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폭력의 그물망 속에, 그 한복판에 살고 있다는 것에 관해 성찰하는 일이다.

전기와 수도가 파괴된 곳, 건물들이 부서지고 불타올라 잔해들로 황무지를 이룬 곳. 제발트가 묘사한 독일의 도시들은 그야말로 참혹한 폐허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문명 이전의 곳이 된 게 아니다. 살해당한 자들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곳, 애써 잊고하 하는 곳, 애도가 없는 곳이 바로 문명 이전의 곳이며, 진정으로 지옥이란 이름으로 부를 만한 곳이다. ( W. G. 제발트, 『공중전과 문학』)

제발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하나의 예시이다. 여전히 ‘문학의 소용’이랄 게 있다면, 그것들 중에 적어도 확실한 하나는, 잊지 말하야 할 것을 기억하려는 의무에 충실하려는 지난한 노력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여기에서, 문학은, 글쓰기는 과연 타인의 고통을 사유하고 있는가? 여전히 남아있는 폭력들에 끈질지게 반항하는 동시에, 하루 어치의 싸움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우리보다 앞서 폭력들에 희생된 이들을 위한 애도를 해야하는 게 아닐까? 내 다음 발걸음은 아마도 이 물음을 계속해서 묻는 쪽을 향할 것이다.

단현
danhyun01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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