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장난 비슷한 것으로 시작해 보자. 칸트는 보편적인 당위명제당위적으로 말했는가? 즉 그가 선험적인a priori 윤리 명제가 있음을 말할 때, 그가 주장한 것은 <그러한 명제에 따라 우리가 살아야 한다>였는가 또는 <우리는 그러한 명제를 직관적으로 안다>였는가? 전자라면 칸트는 철학적 주장을 한 것이 아니다. 철학적인 주장이라는 것은 선험적 사실에 관련된 명료화와 관련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하는 이른바 “정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라는 것을 철학적 분석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면, 이는 그 명제가 칸트에 의해 주장된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어야 함을 함축한다.

<통시공간적으로 절대자적인 윤리적 법칙은 지금까지 발견된 적 없다. 그러므로 선험-보편적 윤리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혹자는 이와 같은 주장을 통해 칸트의 사상을 반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주장은 칸트가 발견하려 했고 또 내가 실재한다고 믿는 그런 명제의 성질을 오해한 결과이다. 크립키가 <명명과 필연성Naming and Neccesity>에서 예시로 든 ‘미터 원기 논증’을 생각해 보자. 미터원기의 길이를 1미터로 정의하던 시절을 가정하자. 이 때 미터원기의 길이는 절대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을 1미터의 길이라고 정의한 것은 순전히 역사적 산물이다. 그러나 바로 그 시기의 미터원기 길이로 1미터를 정의하고 나면, <1미터>를 이해하는 언어공동체에게 그것의 정의는 선험적이며 보편적인 것이 된다. 즉, 어떤 기준은 그것이 설정됨을 통해 선험성을 얻을 수 있다.

명시적으로 수행적인 문장들이 대체로 그 선험성을 부여한다. 오스틴이 <말로 어떤 것을 행위하는 법How to do things with words>에서 드는 예시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사제가 정당한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세례를 준다면, 세례를 줌과 동시에 그 수세자는 사제가 주는 이름(예컨대, ‘맛디아’)을 받는다. 내가 누군가와 정당한 방식으로 결혼식을 올릴 때 나는 그와 결혼한 것으로 간주된다. 내가 어떤 것을 정당한 방식과 서로 간의 정당한 합의에 따라 약속할 때 나는 그 약속한 행위를 실행한다.

세 행위는 어떤 공통점을 갖는가? 바로 이 행위가 특정한 실천적 의무를 부과한다는 것이다. 수세자를 바로 그것으로 부른 최초의 사건과 그것에 따르는 공동체의 승인이 있었기에, 공동체는 ‘맛디아’를 통해 바로 그 수세자를 지시하게 된다(즉, ‘맛디아’는 수세자의 적합한 이름proper name이 된다). 내가 누군가와 결혼함을 통해 나와 배우자는 서로를 혼인 관계에 있는 상대로 대해야 한다는 의무를 얻고, 공동체는 우리를 부부로 대하게 된다. 약속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명백하게 실천적 의무를 부과한다.

만일 ‘맛디아’로 다른 사람을 지시하려 한다면 나는 지시에 실패할 것이다(“당신은 잘못된wrong 방식으로 그 이름을 사용했다.”). 파혼 전에 새로운 결혼을 하면 그것은 부도덕하고 무효의 행위로 간주될 것이며, 어떤 부부를 부부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 될 것이다. 내가 약속한 바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나는 도의적 잘못을 저지른 것이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구성한 기준도 구성 이후에는 선험적이며 절대적인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예시들은 선험적인 가언 명령을 해명해줄 뿐이다. 어떤 명령이 선험적이라 해도 우리는 그것의 발생적 근거를 해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험적인 실천 명제가 있음을 해명할 수는 있지만 칸트가 찾으려 한 정언 명령이 있음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해명이 있어야만 한다.

어떤 실천적 명제는 어떻게 정언적인 형식을 띌 수 있는가? 칸트의 주장을 새롭게 정리하자면 가장 순수한 실천적 명제는 그것의 형식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든 윤리적 직관을 검토한 뒤, 그것이 공유하는 어떤 형식을 발견할 때 그 형식을 보고 정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형식이 순수한 의미에서 유일한 윤리학적 사실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이 점을 “윤리학이 언표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윤리학은 초월적이다.”(6.421)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는 보다 앞서 언급된 “논리학은 교설이 아니라, 세계의 거울상이다. 논리학은 초월적이다.”(6.13)과 비견된다. 논리학이 우리의 언어 행위로부터 드러나는 하나의 일반 법칙이듯, 윤리학 또한 우리의 윤리적 행위로부터 드러나는 하나의 일반 법칙이다.

어떤 것이 윤리적으로 합당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직관으로부터 안다. 최소한 동일한 윤리적 직관을 갖는 두 사람이 있다면 그 둘은 어떤 행위를 낱낱이 분석함을 통해 동일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전혀 다른 윤리적 전제로부터 출발했다면 이는 단언하기 어려울 것이지만. 윤리에 있어서도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에서 말한 “돌쩌귀hinge”랄 만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윤리적 직관”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돌쩌귀 명제들로부터 앎의 확실성을 얻듯 우리는 윤리적 직관으로부터 당위의 확실성을 얻는다. 내가 보건대, 칸트가 발견한 “명령”은 바로 이 직관을 지칭한 것이다.

이하의 목록은 병렬적인 단편들이다. 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윤리적 직관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말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 모든 단편이 한 곳을 향한다. 5절에서부터 나타나는 모호함과 비약에 대해서는 미리 양해를 구한다.

2.

복제 가능한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이 있다. 철학은 전통적으로 전자를 ‘보편자’, 후자를 ‘개별자(또는 ‘특수’)라는 이름으로 불러 왔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보편자에 해당하는 것은 속성이다. 이는 언어 상으로는 술어predicate로 표현된다. 개별자에 해당하는 것은 대상이다. 이는 언어 상으로는 이름name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하나의 개별자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현대 언어철학은 그것이 두가지 방식으로 나뉠 수 있다고 말한다. 먼저 ‘일반 사고general thought‘라고 불리는 사고의 종류로 대상을 사고할 수 있다. 이는 어떤 속성의 연언으로 그 대상을 사고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나는 “그 김천고등학교 1학년 3반 10번 학생”을 일반사고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때 그 학생은 <김천고등학교 학생이다>와 <1학년이다>와 <1학년 3반에 소속되어 있다>와 <그 반에서 10번이다>가 연언됨에 따라 특정된다. 일반 사고는 언어에 대한 사고de dicto thought이다. 내가 그것을 발화할 때, 속성에 해당하는 대상이 바뀐다면(예컨대, 학년의 진급에 따라) 그 대상도 바뀌기 때문이다.

반대로 ‘단칭 사고singular thought‘라고 불리는 사고의 종류도 있다. 이는 어떤 표현을 통해 그것과 관련된 바로 그 대상을 지칭하는 방식에 관련된다. “그 김천고등학교 1학년 3반 10번 학생”이라는 말로부터 나는 어떤 하나의 대상을 특정한뒤, 그것을 하나의 이름으로 사용하여 더이상 그 대상이 기술구에 관련된 속성을 갖지 않아도 그를 지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단칭사고는 실재에 대한 사고de re thought이다.

러셀은 “정말 적절한 이름”이라는 것은 오로지 단칭 사고에 대한 것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대부분의 이름은 적절한 이름proper name의 성격을 띄는 듯 사용되지만 실제로는 어떤 기술구의 축약일 뿐이다. 예컨대 우리는 ‘러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영국 수학자/논리학자/철학자’ 등의 기술구를 의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이름은 가짜-적절한 이름pseudo-proper name이다. 그는 적절한 이름은 오로지 직접 지각된 앎acquaintance knowledge에 따른 대상 뿐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러셀은 “이것” “저것” “여기” 등의 예시를 든다. 직접 지각하는 대상에 관련된 이름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술구에 의한 것이고, 일반 사고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러셀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친밀한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그의 이름을 사용하거나, 유명한 누군가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데, 이 때 그 대상에 대한 어떤 기술구도 떠올리지 않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습관적으로 친구 아무개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크립키가<명명과필연성Naming and Neccesity>에서 드는 또다른 예시인 <파인만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때 오로지 그 대상을 생각하며, 심지어 그와 관련된 기술구가 실제 그 대상이 갖는 속성과 불일치하더라도 이름을 통한 지시에 성공할 수 있다.

왜 이런 지시가 가능한가? 추측컨대 그것은 친밀감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발화자에게 개인적으로 매우 익숙한 사람의 경우나, 발화자가 속한 언어 공동체가 상식으로써 그 이름을 사용할 경우 직접 지시가 아님에도 단칭 사고를 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나의 친구를 별도의 기술구가 수반되지 않고 부르는 경우가 해당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파인만’이나 ‘괴델’, ‘아인슈타인’, ‘문재인’ 등의 표현을 사용하면서 지시에 성공하는 경우가 해당된다. 전자가 가능한 것은 우리에게 기억이라는 사실(그것이 물리적인지, 심리적인지는 별개로 두고)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후자가 가능한 것은 우리가 언어 공동체로부터 상식적인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직접 지시가 수반되지 않은 단칭 사고의 가능성은 돌쩌귀 명제들로부터 발생한다고 추측하자는 것이다.

전자는 그렇다 하더라도, 후자의 사례가 돌쩌귀 명제로부터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본다. 누군가가 <아인슈타인은 실존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우리는 그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하려 하기보다는 그에게 <당신의 생각은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려 할 것이다. 어떤 유명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언어로부터 확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돌쩌귀 명제의 특징에도 부합한다. 마찬가지 명제들로 <달에는 사람이 간 적이 있다>나 <나 이외에도 사람들이 존재한다> 등을 생각할 수 있겠다.

이 상상이 오로지 신화일 가능성도 물론 고려할 수 있다. 여전히 우리는 누군가를 일반사고로 지칭하는 것인데, 그 일반사고에 연언된 속성이 무한히 많아서 그것이 단칭 사고라고 착각한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떤 대상에 관한 속성 중 거짓인 것이 있음에도 그 대상이 지시될 수 있는 문제를 ‘여전히 기술구의 대다수는 그 대상을 지시하기 때문’이라고 해명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반론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복잡한 철학적 문제를 만들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실제로 어느 하나에 대한 생각이라고 느끼며, “이것”, “저것”을 지칭할 때 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그 사고의 대상을 지칭한다는 점이다. 이는 직관적으로 분명하다.

3.

다시 윤리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어떤 것은 어떻게 윤리적 행위의 대상으로 ‘격상’ 되는가? 내가 보건대 칸트의 방식은 어떤 윤리적 대상이 우리 언어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 지위를 보장하자는 것이다. 칸트는 직접적으로 ‘언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대신 <윤리 형이상학 정초>의 칸트는 이를 “이성적 존재자들”이라고 부른다. 그 범위를 언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좁힌 것은, 누군가가 합리적 주체인지 확인할 근거를 그의 추론 능력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윤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예지계에 속한 인간 이성이 영혼, 자유, 신을 추론해 내야 한다. 그런데 이 능력은 선험적 추론에 의한 것이다. 그 과정은 필히 언어를 통한 추론 과정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윤리의 주체가 되는 이들은 동일한 합리적 토대를 공유하는 언어 공동체의 구성원이어야 한다.

한편 그 윤리의 주체들이 윤리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칸트가 주장하는 “정언 명령”의 패러프레이즈 중 하나인 ‘목적성의 정식’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정초>, 148. 백종현 역.) 상대를 목적으로 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그는 “존경의 대상”으로 삼는 것, 즉 그 대상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가 보기에 ‘물건들’이라고 불리는 대상들은 목적성 정식의 적용 대상으로 고려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조건적 가치만을 갖는”(ibid., 146.) 때문이다. 이들과 대비되어 이성적 존재자들은 무법칙적인 목적의 자유를 갖는다. 그리고 오로지 이성적 존재자만이 이런 자유를 얻는다. 그래서 결국 칸트에게는 윤리의 주체만이 윤리적 행위에 참여하며, 윤리적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칸트의 윤리학은 하나의 윤리 법칙을 토대로 삼는 언어 공동체의 일원에게만 지위를 보장하는 윤리학이다.

칸트의 주장은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정당화되는 몇 사례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다. 예컨대, 우리는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윤리적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다. 또한 법적으로도 그들은 행위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여겨진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그들은 자신의 법적 행위의 결과를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칸트가 이성적 존재자의 기준으로 삼은 것과 결국 동일하다. 그들은 법적 활동을 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문법을 불완전하게 배웠다. 그러므로 법적 능력이 없다. 외국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외국인은 그의 국적이 기입된 국가와 우리나라가 특정한 방식으로 조약을 맺지 않은 한 국내에서 법적 행위를 할 수 없다. 이를테면 국가 간 수교 행위는 상대 국가가 납득할 만한 법적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만일 언어 교류도 없으며 상대 국가와의 어떤 수교도 없는 상태에서 그 나라의 시민이 난데없이 우리나라에 떨어진다면 우리는 그에게 어떤 법적 능력도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목적성의 정식은 몇 가지 반직관적인 사례를 도출한다. 만일 칸트의 주장처럼 오로지 그가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 그를 윤리적으로 대해야 한다면, 어떤 인간-종 개체에 대해서는 윤리적으로 대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사리분별을 할 수 없는 태/영/유아나 정신이상에 따른 심신상실자, 뇌사자 등이 그 예시이다. 그러나 그들이 윤리적으로 대해져야 한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옳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우회로를 만든다. <그들은 합리성에 대해 잠재력을 가지므로 인간성에 의해 대우된다.> 하지만 이 우회로는 찜찜함을 남긴다. 현행적인 행위 외에 그의 합리성을 판단할 근거가 있다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본질주의적인 주장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예컨대, 어떤 영장류 개체의 경우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또 수화 등으로 언어적 표현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종에 해당하는 모든 개체는 <잠재력을 갖는다>라는 기준에 따라 인간성으로 대우되어야 하는가?

또, 우리는 인간이 아닌 대상에 대해서도 어떤 윤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동물은 인간보다 작은 합리성의 정도를 갖는다고 여겨지는 바, 그들에게는 법적인 행위 능력, 또는 적극적 권리라고 할 만한 것이 부여되지 않는다. 최소한 칸트의 체계에서는 그렇다고 보인다. 하지만 동물을 구타하는 행위나 과도한 벌목 행위 등은 비윤리적이라는 직관을 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다. 서두에 말했듯 칸트가 어떤 윤리적 명제를 발견한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 가능한 직관의 틀이어야 한다. 그러나 칸트가 제시한 명제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직관이 비-인간 개체에 대한 윤리적 직관에서 등장하곤 한다. 혹자는 <그 직관은 혼란함에서 비롯된 오류이다. 우리는 동물이 고통받는듯 보인다는 점에서 그를 연민하는 인지적 특성을 가진 것 뿐이지, 그를 윤리적 대상으로 대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완전한 설명이 되기는 어려워보인다.

나는 이 반직관적 사례들을 해소하기 위해 <보편 준칙에 따른 행위의 평가>에 적용될 틀을 재구성하려 한다. 보건대 위와 같은 문제가 일어나는 이유는 윤리적 행위의 판단대상이 될 것 중 하나인  ‘피행위자’에게 합리성의 값이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선의지에 따라 상대를 대우하지만, 그것이 곧 상대를 “오로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는 것은 아닌 사례가 존재한다.

윤리적 행위를 판단하는 함수 K(s, o)를 상상해 보자. s는 <주체가 상대방을 대할 때 선의지에 따라 대우하는지의 여부>에 해당하는 변항이며 o는 <객체가 어떤 행위로부터 자신의 자율이 존경되었다고 느끼는지의 여부>에 해당하는 변항이다. 이 때 함수 K는 진리함수와 유사한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즉, K(T, T)의 경우는 선한 행위에 해당한다. 반면 K(F, F)는 악한 행위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윤리적인 평가가 가능한 것은 이 두 경우이다. K(T, F)는 실패한 윤리적 시도를 지시하는데, 칸트는 이것이 육체의 성벽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말한다. K(F, T)는 악한 의도에서 기인했지만 우연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은 사건을 지시한다. 이 경우에 해당할 호칭을 떠올리는 것은 지금 내 목적은 아니다.

앞서 말한 반직관적 사례들은 변항 o의 값이 할당되지 못할 때 발생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만일 s에도 값이 할당될 수 없는 경우라면, 그 사태는 윤리적으로 무관심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든 사례들은 o에 값이 할당되지 않아도 s에 어떤 값이 할당되어야만 한다는 규칙을 함축하는 듯 보인다. 즉 두 반직관적 사례에서, 어떤 행위주체는 윤리에 관심 없이 어떤 행위를 하는데, 그가 속한 윤리 공동체는 그에게 윤리적인 의도를 가지라고 요구한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명제들이 윤리적 직관에 포함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1. s와 o에 모두 값이 할당될 경우, 그 윤리적 사태는 함수 K에 따라 평가된다.

2. s와 o에 모두 값이 할당될 수 없을 경우, 그 사태는 윤리적으로 중립이다.

3. o에만 값이 할당될 수 없는 어떤 사태의 경우, s에 값이 할당되어야만 하며 또 그 s에 관한 어떤 함수가 이 사태의 윤리값을 평가한다.

이제 3에 해당하는 어떤 함수 E(s)를 생각해 보자. 이 함수는 꽤 단순하게 정의될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E(s)는 s=T일 경우 ‘윤리적이다’를 산출하고 s=F일 경우 ‘비윤리적이다’를 산출한다. 일단은 이 함수가 정확히 어떻게 짜여있는지를 논증하는 것도 나의 목적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함수 E와 K가 각각 어떤 집합에 대응되는 윤리함수이냐는 것이다. 내가 보건대, K는 <적극적 권리에 관련된 명제 집합>에 해당할 것이고 E는 <소극적 권리에 관련된 명제 집합>이어야 한다. 각 윤리적 사태들을 분류하자면, E는 K를 포함해야 할 것 같다. <상대를 선의지로 대우한다>는 <상대를 선의지에 따라 대우하여 그가 목적으로 대우되게 한다>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단은 이 둘이 분리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로부터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칸트가 발견한 준칙은 적극적 권리에 대한 것이며 소극적 권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칸트는 적극적 권리에 관한 준칙을 발견했고 그 발견은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외에도 소극적 권리에 관한 준칙이 있다. 윤리적 직관에 비추어볼 때 그러한 사례가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 분명해진다.

소극적 권리는 언제 획득되는가? 앞서 언급한 사례들로부터 생각해 보자. 어떤 아이나 어떤 뇌사자의 몸이 소극적 권리를 갖는 근거는 우리가 그를 어떤 특별한 인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지각에 의해 알지 못하는 개인에 관한 정보의 나열만으로는 그를 윤리적으로 대할 수 없다. 그에 어떤 상상력을 결부짓거나, 그를 하나의 개인 내지 인격으로 직접 대했을 때 비로소 그는 윤리적 대상이 된다. 이에 관련된 사고실험은 5절에서 다룰 것이다. 동물에 관해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공장 안의 일반화된 가축들은, 그것이 그저 숫자들로만 분류되어 있는 경우 우리의 윤리적 감성을 자극하지 못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윤리적 자극을 주는 것은, 실제로 축사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볼 경우나 (영화 <옥자>에서 나타나듯) 이미 나에게 특별하게 여겨진 동물이 도축 대상이 되었을 때이다.

사례들에 비추어보자면 소극적 권리에 관한 간접적인 명제 하나를 얻을 수 있다: <독특한존재가 되는 것은 윤리 공동체의 참여자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이 명제는 앞서 설명한 “단칭사고”나 “적절한 이름”에 관련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이를 윤리 공동체의 참여자로 고찰한다는 것은 그에게 매우 특수한 사고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이에게 개별적이며 실재적인 본질을 부여할 때, 그는 윤리적 대상이 될 지위를 얻는다.

4.

자코메티의 후기작에서 우리는 하나의 특징을 볼 수 있다. 그의 후기 스케치는 대상의 눈에 집중한다. 오로지 눈만이 독특한 것이며, 눈 외의 모든 것들은 모호한 것으로 남는다. 때로는 그 독특함이 얼굴의 형태에까지 넓혀지기도 하는데, 이 때에도 몸의 형체와 그것이 공간과 분리되는 지점들은 모호하게 묘사된다. (사실 스케치에서의 이러한 특징은 그의 초기 스케치에서도 드러나 있다.) 그의 조각 작품에서 이 특징은 <어떤 대상을 특징적으로 만드는signify 그것을 강조한다>는 것으로 전유된다.

그의 작품 <>는 죽음에 가까워져 볼이 패인 친구를 보고 만들어졌다. 죽어가는 그의 몸을 보며 자코메티는 다른 인지적인 특징들이 모호해진 반면 튀어나온 코만큼은 뚜렷한 상징으로 지각되었다고 생각했다. <>는 그 특징을 강조한다. 그 탓에 직육면체에 틀에 갇힌 어떤 얼굴은 그의 비정상적으로 튀어나온 코로부터 활동의 한계를 부과당한다. 단현 또한 강조한 바 있는 <로타르의좌상>을 보라. 앉아 있는, 활동하지 않는 그의 신체는 모호한 모습으로 흘러내린다. 여전히 하나의 형태를 갖고는 있지만 그 몸은 자연물과 형태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오로지 그 머리가, 얼굴로 보이는 그것이 적절한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 로타르의 몸은 하나의 몸으로 특정된다. 많은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걸어가는사람>의 조각에서는 정반대의 특정화가 일어난다. 작품의 이름은 순수한 기술구이다. 그 사람은, “걸어가기” 때문에 하나로 특정된다. 그는 어떤 얼굴을 가짐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운동을 함으로써 하나의 이름을 얻는다.

그의 초기 조각들을 생각해 보자. 자코메티는 자신이 어떤 조각을 하려 할 때, 맨 처음 자신에게 보였던 그 크기로 대상을 조각하는 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한다. 대상의 인상에 꼭 맞게 조각을 하려 했지만 조각을 할수록 그 모양이 작아져 끝내 보기조차 어려울 만큼이 되었다는 것이다. 초기작에서부터 꾸준히 어떤 형태를, 어떤 크기에서도 갖고 있는 것은 그의 동생 디에고와 그가 사모한 여자들의 모습 뿐이다. 그나마도 여자들의 모습은 후기작에서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을 표본으로 일반화된다. 그나마도 모든 가족이 구체화되는 것이 아니다. 자코메티는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아버지의 모습을 밋밋하거나 모호한 얼굴로 묘사하고 있다.

자코메티의 작품을 하나의 묘사로 보자면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미술의 미덕으로 생각되는 실재의재현이라는 과제를 잘 수행하지 못하는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천재라고 부른다. 왜 천재인가? 자코메티의 작품이 우리의 어떤 직관을 미술의 방식으로 드러내기 때문 아닐까? 그리고 그 “직관”이라는 것을 나는 우리의 언어 직관에 연결시킨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렇다: <자코메티의 문제 의식은 우리가 앞서 말한 특수와 보편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우리는 어떤 이를 오로지 술어들의 연언으로 고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해지는 지점이 있다. “테세우스의 배 역설”로 알려진 논리적 난제가 이를 잘 드러낸다. ‘테세우스의 배’는 지금 테세우스가 타는 바로 그 배일 것인데, 테세우스가 다른 배의 선장이 되거나 또는 테세우스가 탔던 바로 그 배의 모든 물리적 구성을 바꿀 때에도 그 배는 ‘테세우스의 배’로 지시될 수 있지 않은가? 이 질문에 대해, 어떤 이들은 그 술어들이 <대상의 본질적 속성을 구성하지 않는다>며 유보한다. 어떤 물리적 속성이, 어떤 생물학적 속성이, 또는 어떤 형이상학적 속성이 있어서 대상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 유보의 끝에서 바로 그 “본질적 속성”이라는 것이 드러나기나 하는가? 발견되지 않는 본질적 속성을 단순히 믿기만 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리적 존재자를 끌어오는 의심스러운 시도 아닌가?

자코메티가 그의 작품을 통해서 말할 수 있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의문에 관한 문제이다. 어떤 대상을 고찰할 때, 내가 알고 있던 그 대상의 속성들로는 그것을 올바르게 묘사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그는 속성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어떤 본질을 표현하려 애쓴다. 초상 스케치에서 이 본질에 해당되는 것은 눈빛이다. 조각에서는 얼굴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정말 그 눈의 형태나 얼굴에 해당하는 위치의 모양이 본질이라고 말하려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단현의 말처럼 “신체의 그 어떤 조직이나 장기, 혹은 그것들의 집합도 ‘얼굴’에 상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걸어가는사람>이 그 증거이다. 어떤 이들은 이 작품에서 그 조각의 ‘얼굴’을 본다. 그러나 조각을 찬찬히 살필 때 알 수 있듯, 얼굴의 위치에 그를 특정할 수 있는 콧구멍, 눈, 입술과 같은 것은 없다. 이 조각에 어떤 얼굴을 주는 것은 그의 운동력이다. 정말로 내게 다가올 것만 같은 텅 빈 얼굴이 그로 하여금 하나의 얼굴을 갖게 한다.

자코메티가 체이스맨하탄은행 플라자에 세우려 한 세 동상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의 기획은 <걸어가는사람><서있는여자>가 있고, 불안한 두 축을 비껴서 <기념비적머리>를 세워두어 온전한 삼각형을 만드는 것이다. 왜 여기에 머리가 있는가? 자코메티는 어쩌면 서로 다른 특수의 방식들을 병치하려는 것 아니었을까? 그의 운동을 통해서 하나의 대상이 되는 사람(아마도 남자였을)이 있다. 그리고 여자라는 것 자체로 하나의 유일한 특수를 지시하게 되는 여자의 모습(자코메티에게는 여성에 관한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일까?)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떤 이를 특수로 만든다고 믿는 근거인 머리가 있다. 그 중 어느것 하나도 특수를 향한 유일한 매체는 아니다. 그 상징들이 아니라, 그 상징과 대면하는 방식이 그들을 특수로 만든다. 그 방식이란 이차원적으로는 <눈빛>으로 묘사된다.

보편과 특수라는 것이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매우 아래에 있는 무엇을 보편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또한 그것이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를 따르는 이들의 생각이었던 것같다. 그런데 자코메티는 그 생각을 뒤집는다. 그것을 특수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래에 있고 가장 작은 본질이다. 보편은 특수를 덮고 있는 살이다. 어떤 특수를 설명하기 위해 자코메티는 그 살을 모두 잘라낸다. 잘라낸 뒤에 어떤 운동성, 어떤 상징성, 어떤 눈빛만을 남겨둔다. 이 눈빛은 그것을 구성하는 속성들이 아닌 바로 그것의 본질을 인식하게 하는 움직임이다.

5.

근대 사회의 편집증적 행위를 고찰해 본다. 근대 국가는 개인을 특정한 속성의 집합으로 환원하려 한다. 오늘날 개인의 식별자는 ‘Identification’을 줄인 ‘ID’로 불린다. 이는 <Identity화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이해된다. 그리고 Identity는 라틴어 identitas에서 온 것으로, 처음에는 자기동일성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 “동일성”이라는 것이 근대적인 방식으로 정체화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가 정체화되는 방식은 개인을 개별화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각자는 어떤 기호에 따라 식별된다는 점에서 이름을 갖고있는 듯 생각되지만, 실제로 그 기호는 어떤 술어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러셀이 말한 바 “pseudo-proper name”에 해당한다.

정말 근대 시민의 식별자는 술어들의 함축인가? 1987년 6월 10일에 태어난 남자 전태우씨를 생각해 보자. 그의 이름을 구성하는 ‘전’과 ‘태우’ 중 “전”은 그가 ‘전’이라는 성을 가진 가계에 속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식별번호 역할을 하는 주민등록번호는 870610-1xxxxxx의 형식으로 되어있을 것인데, 앞의 여섯자리는 그가 87년 6월 10일에 태어났음을 말하며 뒤 일곱자리 중 첫자리인 1은 그가 20세기에 태어난 생물학적 남성에 속함을 의미한다. 이하의 다섯 숫자는 그가 태어난 행정 구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 숫자는, 주민등록번호의 중복을 막기 위한 것으로 그 날 태어난 순서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그의 신상명세가 국가 및 그가 속한 집단에 기록되는데, 이를 통해 “전태우”는 (일상적인 사용에 해당하는)그 이름이 지시하는 어떤 개인 외에도 (행정적 사용에 있어서는)주민등록번호와 결합하여 그를 정체화하는 목록의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다. “태우”는 그 중에서도 가장 이름에 가까운 것일 텐데, 문화와 언어의 한계로부터 그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이들이 생겨나고, 제도는 <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집합> 안에 어떤 사람의 식별자를 넣는다. 실제로 제도화된 사회에서 문서 상으로 고유성을 갖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우, 이름에 사용할 수 있는 한자의 가짓수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누군가 말한다: <개인은 근대의 산물이다.> 이 개인은 어떤 개인인가? 문서 상으로 식별된 그런 개인이다. 개인들이 식별되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사고실험을 하나 해 보자. 분자구조 단위의 관찰을 수행할 수 없는 어떤 사회가 있다. 그 사회에 갑자기 다섯 명의 사람이 등장한다. 다섯 사람은 외모나 이름, 갖고 있는 기억, 사용하는 언어 등에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그가 점유하는 시공간적 위치에 따라서만 이들을 구분할 수 있다. 근대국가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까? 만일 그들을 추방하거나 그들에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것이 아닌 한 가능한 상황은 단 하나이다. 우선 국가는 그들을 서로 다른 기호로 식별할 것이다. 서로 다른 것으로 식별된 한에서야 그들에게 권리를 주고 그들의 권리 행사를 감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에 탄생했다는 “개인”의 개념은 이러한 개인의 개념이다: “어떤 속성들의 연합으로 식별 가능한, 권리와 책임의 담지자.” (일단은 이 개념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잠시 포르노그래피에 대해 생각해 보자. 포르노그래피는 성기라는 생물학적 기관으로 하여금 행위자를 식별하는 수단이 되게끔 한다. 즉 포르노그래피는 극중 참여자들을 생물학적 성에 따라 보편화시킨다. 일단 포르노그래피에 있어서는 <그가 어떤 성기를 갖고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물음이다. 물론 배우들에 관련된 그 외의 속성들이 부가되며 하나의 장르를 형성하지만, 이 장르는 성기라는 보편 이후에야 등장한다. 포르노그래피를 나누는 가장 근본적인 기준이 스트레이트/게이/트랜스/레즈비언이라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먼저 성기에 따라 나뉜 장르는 “이 필름은 이런 들로 구성된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제목을 통해 하나의 개별적인 포르노그래프가 된다. 모든 포르노 필름의 제목이 어떤 속성의 연언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그리고 그 속성이 필름 속 여자, 외국인, 아이가 갖는 속성임을) 생각해 보라. 포르노그래피가 비윤리적이라면, 그것은 대상을 보편으로 환원해 대상화하기 때문에 비윤리적이다. 포르노그래프 앞에서 그것의 시청자들은 시선의 주체가 된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사회 통념이 남성의 시선으로 여기는 것을 닮아 있다. 이 또한 여성혐오와 엮여 포르노그래피를 비윤리적이게끔 하는 요소이지만 이 글에서는 잠시 접어두도록 하겠다.

한편 포르노그래피가 고도로 발달한 나라, 예컨대 일본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포르노그래피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과연 보편에 잠식되어 있는 것인지 혼란을 겪게 되곤 한다. 일본의 포르노그래프 소비 양상은 아이돌 팬덤이 보이는 모습과 흡사하다. 이 때 한 사람의 배우는 그가 출연한 포르노그래프들을 대표하는 하나의 술어이면서, 그 술어의 본질을 형성하는 이름이 된다. 이 때 역설이 발생한다. 상대를 대상화하는 극단에서 어떤 특별한 개인이 떠오른다니? 물론 일본의 포르노그래피는 여타 국가의 것과 마찬가지로 비윤리적이며, 그 정도를 나눌 수 있다면 더 큰 비윤리성을 가질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양상이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지는 않겠냐는 물음이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그 기회는 포르노그래피에서의 기회라고 할 수는 없겠다.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포르노그래피로 대표되는 근대국가의 편집증에 관한 것이다.

단현은 이 시대가 “포르노그래피즘”을 향해있다고 말한다. 포르노그래피의 본질적인 특징인 <보편적인 것으로의 환원>을 생각하자면, 그의 지적이 맞을 때 이 시대는 모든 것을 보편적인 데에 환원하며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보편적으로 환원될 때 반대로 가장 독특한 개인이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이 개인이 등장하는 것은 정확히 어떤 시점인가? 나로서는 그 원리를 밝힐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단현이 말하는 포르노그래피의 원리, 즉 어떤 신체를 구속하는 그 원리의 이면에서, 그로부터 구속당하는 어떤 다른신체가 등장한다. 그 다른 신체는 구속하는 신체와 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신체에 관련되어서 그 이름은 다른 방식으로 역할한다.

근대 국가는 이른바 포르노그래피즘의 기조 아래 발전하고 있다. 모든 개인은 무한에 가까운 술어의 연언으로부터 규정된다. 아마 최초의 근대 국가나, 최초의 포르노그래피가 이렇게 세밀한 규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알기로 초기의 근대 세계는 단순히 계급으로, 사는 곳으로, 성姓으로 또는 성별性別로, 인종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모순이 지적된다. <보편화된 개인들이 정말로 오로지 보편화된 것인가? 실제로 저 개인을 구성한 토대로서 어떤 본질이 있지는 않은가?>

6.

규격화는 오로지 윤리적 비극일 뿐인가? 오히려 규격화는 최소한 두가지 방식으로 윤리적인 장점을 만든다. 첫째로, 어떤 개인이 규격화됨에 따라 비로소 그는 적극적 권리의 주체가 된다. 그리고 그가 적극적 권리를 갖는다는 점으로부터 그는 하나의 인격임이 추론되기에 동시에 소극적 권리가 제공되는 대상이 된다. 근대의 방식으로 개인을 발명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그 개인의 권리 근거는 있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로, 이 규격화가 가속됨에 따라 권리의 주체는 명목상으로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어떤 한 개인으로 특정된다. 권리 담지자의 범위에 관한 의문들이 모든 개체를 보편자로 분해해서 구분해야 할 것이라는 강박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보편으로 최대한 해체된 것이 가장 개별적인 것으로 귀결된다. 단현이 서두에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의 진동”이라고 묘사한 현상이 아마도 이 특정에 관련될 것이다.

보편자들이 무한한 가짓수의 조합을 이룬다. 근대라는 시기가 갖는 편집증적 집착이 그 조합을 더 명시적이게끔 한다. 현재의 기준에 비추어 조금이라도 구분 불가능한 두 개체가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든 둘로 구분하고,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그 개체들을 식별하려 한다. 이 식별이 우리가 배워서 아는 근대적 직관이다. 하지만 이 직관은 항상 난관에 봉착한다. 어떤 경우,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속성을 조합했지만 그것에 해당하는 것을 찾을 수 없게 되곤 한다. 반대의 경우로, 어떤 명백하게 있는 것이 모순되는 방식으로 묘사되거나, 심지어 그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묘사됨에도 바로 그것에 해대 말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이 이런 속성들을 갖기에 이렇게 부를 수 있다.>라는 근대적 강박은 결과적으로 한계를 갖는다. 어떤 지점에서 우리는 그것의 개별적 본질을 말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묻는다. <신체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이해하는 바가 맞다면, 이것은 어떤 행위를 하는 고유한 주체가 어디에 있냐는 물음이다. 나는 답한다. <그런 것은 발견될 수 없다.>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우리는 대신 이렇게 물었어야 했다. <우리는 무엇을 신체라고 부르는가?> 이제 나는 답한다. <우리는 유일한 그 사람에게 신체를 부과한다.> 이렇게 부과된 신체는 오로지 명목적인 것은 아니다. 나 또한 그 신체가 부과된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적인 경험을 통해 이 신체가 오로지 공동체의 소유가 아니라는 점을 믿게 된다. 부과되는 신체뿐 아니라, 즉 어떤 술어들로 기술되는 신체뿐 아니라 고유한 어떤 것으로서 있는 신체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공동체의 언어로부터 나 외의 개인들 또한 어떤 고유한 신체가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긴다. 그런 신체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가 말하기 때문이다. 이 신체는 공동체가 부과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 신체를 부르기 위한 기호는 공동체가 부여한다. 하지만 그 기호를 통해서 지시되는 것은 우리가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신체를 말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화자들은 그 기호를 사용한다.

내가 갖는 신체와 내가 마주하는 신체가 같은 신체인가? 이것은 순전히 상상력의 영역이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우리와 비슷하게 행동하고, 같은 언어 공동체 안에 있기 때문에 동일한 경험을 할 것이라고 믿곤 한다. 이 믿음은 논리적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다. 지금 철학적인 논변을 쏟아낸 내가 실제로는 사람이 아니라 프로그램된 일종의 “논증 기계”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근거가 여러분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의 움직이는 몸을 볼 때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저 몸은 자연적인 몸이 아니라 인공 신체이며, 행동은 인공 두뇌가 명령한 결과일 수 있다.>라고 믿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탓이다. 내 앞에서 정말로 움직이는 신체가 나의 몸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그 믿음이 우리에게 선험적인 규칙으로 있는 탓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규칙이 우리를 윤리적 인간으로 만드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이렇게 보자면 앞서 제시한 함수 K는 함수 E의 응용에 불과하다. 행위 객체의 느낌이라는 것은 관찰에 의해서 진리값이 결정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 과학은 우리가 상상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칸트는 동물 학대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오로지 간접적인 의무일 것이라고 했지만, 오늘날 과학의 발견은 동물들이 합리성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제안한다. 고릴라 ‘코코’는 수화를 통해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보노보 ‘칸지’는 키보드를 통해 사람과 소통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발성 기관의 문제로 음성 언어를 사용할 수 없고, 인류 평균에 비해 지적 능력이 낮다는 점 정도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어 사용에 장애를 겪는 인간 개체에게도 모든 소극적 권리를 허용한다. 이들과 소통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증언을 들은 이들은 동물에게도 어떤 본질적인 신체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당혹감에 빠진다. 동물권에 관해 긍정적인 윤리적 직관을 가진 이들은 아마도 이러한 시대의 산물일 것이다.

7.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에 예술 작품으로부터 그 고유한 아우라가 탈각되고 있음을 말한다. 작품이 복제 가능하다는 것은 어떤 작품에 있어 그것을 막 대면하는 순간의 이미지 외에도 그것이 갖고 있는 정보 차원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결과 복제시대의 인간은 어떤 하나의 예술작품 앞에서 그 고유성을 숭배하거나, 그것과 인식주체가 공유하는 시공간적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나의 작품이 그것의 정보로 환원되는 시대상은 어떤 대상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것을 관련된 속성으로 분석하려는 근대의 정신과 닮아있다. 하지만 벤야민이 사회주의 리얼리즘 영화에서 포착했듯, 복제 가능한 정보 뒤에 그 정보를 만드는 하나의 인격이 상상된다. 그리고 복제되는 것들 가운데 나 또한 복제되고 표현되는 대상으로 있음을 발견하며, 나의 인격이 움직이는 방식을 떠올린다. 그 나와 내가 보는 것 이면의 주체를 동일시할 때 윤리가 시작된다.

모든 것이 양화되는 금시대의 정치적 양상은 하나의 기회이다. 인간 중심적 윤리에 싫증이 난 이들에게는 말이다. 근대국가에게서 비롯된 양화와 식별화identification는 개별자에 대한 보편화의 연장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으로부터 개별자를 해방시키는 기회인 것이다. 모든 것이 보편에 의해 재구성되기 때문에 우리는 나와 타인의 차이 및 유사함을 명확히 알게 된다. 더 나아가 겉으로는 알 수 없던 유사성을 생물학적 분석과 임상 실험을 통해서 상상한다. 이렇게 우리는 <나와 유사한 어떤 것>의 상상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어떤 행위에 윤리적 기준을 대는 선험적인 직관이 있다. 이 직관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에게 선한 의지로 행위해야 한다고 말하며, 특히 그것이 나와 비슷한 본질을 가진다고 여겨질 때 그렇게 행위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적인 사회에서 윤리가 가능할까? 타자와 나를 동일시하는 상상력이 있다면, 가능하다. 그리고 우리의 사회 체제는 그 상상력에 기반하여 세워져 있다.

이제, 윤리적 인간(또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적 상상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신학적 상상력”이란, 윤리적으로 필요한 모든 낙관이 실제로 그러리라고 믿는 상상력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모든 이들에게 고유한 어떤 것이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상상되어야 한다. 물론 그 고유성이 선천적인 어떤 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런 선천성을 말할 수도 없다. 우리가 아는 한 어떤 이에게 고유한 면이 있다면, (찜찜한 기분과 함께)속성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어떤 본질을 임의의 기호로 지칭할 때 상상되는 그런 고유한 면이다. 이 상상은 정당한가? 정당하다. 우리의 언어 사용은 우리에게 이러한 방식의 상상을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본질이 있으리라는 기대는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 칸트의 “추론”은 이러한 방식의 정당화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선 이들을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은 보편화에 맞서, 또한 그 보편화를 통해 보편화로부터 나오는 비윤리적 결과를 틀어놓는다.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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