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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라는 작업은 세계상에서 혼란을 걷어내는 데에 목적을 둔다. 내가 배우기로 철학은 그런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 연구는 어느 시기에는 매우 철학적인 의의를 ⎯ 여전히 그것은 그 자체로 철학적인 작업은 아니고, 분석되어야 할 대상이었겠지만 ⎯ 갖고 있었을 것이다. 계보학적 작업이라고 부르든 통시적 방법이라고 부르든 그러한 작업은 특정한 문제를 위해 채택되었던 도구이다. 그리고 이 도구를 통해 닿으려던 결론에 이르렀던 과거를 갖고 있다. 계보학적 작업이 우리에게 말해준 유일한 철학적인 결론은 <어떤 개념을 너무 진지하게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방법론적 성찰이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결론을 안다. 우리는 이 결론을 재론하기보다는 다른 철학적 문제들을 다뤘어야 한다.

과거에 제기되었고 지금에도 유효한 철학적 과제가 있을까? 나는 정말로 그것이 있다고 믿는다. 있다면 어떤 것이 그 과제인가? 바로 의미를 명료하게 만드는 일이다. 플라톤 이래로 철학은 어떤 개념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해야하는지 탐구해 왔다. 고대에는 ‘우리의 개념이 어떤 유일한 실체를 가리키느냐’가 철학의 주요한 문제였고, 중세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를 탐구했다. 근대에 이르러 그러한 실체가 있느냐는 것을 회의하기 시작해 ‘우리가 어떻게 개념을 얻을 수 있는가?’를 말하면서 바로 그 ‘어떻게’에 해당하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이를 계승한 근세 후기, 또는 현대에는 ‘어떻게’에 접근하기 위해 배제해야 하는 것들을 잘라냈다. 한편에서는 분석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편에서는 현상학이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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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명료화를 수행한다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우리 언어를 살핀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언어로 이야기하며 오늘의 개념을 사용한다. 고대 그리스어를 사용해서 철학하지 않으며, 한문으로 철학하지도 않는다. 그런 고대 언어를 사용할 때에도, 이는 우리의 사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옛 사유를 해석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어떤 것의 개념이 변하여 왔음을 발견했는가? 그렇다면 지나간 이전 개념을 뒤로 하고 오늘날의 쓰임새를 살피면 된다. 어원학적 근거를 통해 오늘날 우리 개념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지금의 언어와는 동떨어진 탁상공론이 된다. 개념의 의미가 변화했음을 근거로 오늘의 개념이 틀렸다고 말한다면 무엇이 옳은 개념의 기준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우선이다. 전자는 무의미하고, 후자는 그 기초를 위해서라도 오늘의 언어를 살펴야 한다. 옳은 개념의 기준을 만드는 규범 자체도 오늘날의 문법이 형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과제를 의미의 명료화로 축소함에 따라 철학의 어떤 한계를 마주하게 된다. 철학의 본질이 오늘의 언어를 살피고 그 뜻을 분명히 하는 데에 그친다면, 철학자는 단순히 언어화된 권력에 봉사하는 노예가 되는 것 아닌가? ‘전복’이니 ‘탈-‘ 운운하는 말이 붙은 사상의 기조가 바로 이러한 걱정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 기조 하에 이루어진 사상의 전개가 그럴 듯했는지는 의문이다. 탈-권력을 표방하는 운동들은 어떤 근거를 가질 수 있는가? 어떤 실재적인(그러나, 언어와는 별개의!) 근거가 그들의 새로운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철학이라기보다는 신학의 자기주장에 가깝다. 별 근거 없이 우리가 언어-권력이라 불릴 만한 것 아래에 있기에 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그 주장은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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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은 탁상공론이 아닌 변혁으로 귀결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 변혁이 반드시 급진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실제로 동의하는 규칙과 명문화된 규칙 사이의 차이를 포착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보기에 철학을 한다는 것은 그 차이를 수색한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개념의 틀이 있고, 한 시대의 언어 공동체 구성원들은 그 틀에 따라 살아간다. 그리고 각 틀의 배치는 배치의 형식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바 ‘축-명제’라고 할 법한 것을 형성한다. 차이는 이 형성 후에 발생한다. 어느 순간에 기존의 언어 규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언어 현상(사실 그것이 바로 ‘현상’이지만)이 발생한다. 언어 규칙의 경계라는 것은 분명히 있지만 매우 모호하고 어느 정도 열려있기 때문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그 열림으로 인해 의미가 흔들리는 어떤 개념에 대해 그것을 명확하기 하는 일이다. 이로부터 새로운 경계가 지어지고 우리 언어는 다시금 확고한 토대를 얻는다.

모든 철학적인 활동이 언어의 명료화를 위해서만 있어야 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철학적 활동은 그것이 다루는 개념의 의미가 명료하게 됨에 따라 완성되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의미의 명료화와는 별개로 오로지 어떤 실천을 위해 형이상학적인 명제들을 가져온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활동에 가깝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발견이 말하듯 선험적인 것은 우리 언어 활동으로부터 드러나는 그것의 전제이다. 전제라고 생각되는 통속적 인식이 그른 때에 철학의 할 일이 있다. 의미를 명료하게 해서 우리의 언어 사용에 단단한 기반을 형성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배운 철학이다.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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