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과 후회, 그리고 희망

왜 이른바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가? 그의 탄생 자체가 우리의 현재적 행복을 확언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의 가르침이 위대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오히려 그가 이루었다는 위대함이 지금 우리의 곁에는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탄생이 열어준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과 그리움 속에서 그의 탄생을 기념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탄생이 정말로 일어났었음을 믿으며, 그가 열어준 기회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리고 다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결단 속에서 그의 탄생을 기념한다.

영화라는 예술은 다른 예술 장르들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가?

영화는 한 눈에 보아도 다양한 예술들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움직이는 사진이거나 그림이며, 연극의 영상화인 듯하다. 또한 서사를 손에 쥐어 문학과 관계하고, 음악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때로는 무용 혹은 조각과도 연관성이 보인다. 건축과 미장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더 깊게 이들 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 관계는 단순히 영화가 그것들을 ‘사용하고 있다’에 한정되지 않는다.

비평의 본질과 대안적 비평: 밤비의 “(나에게) 영화 비평이란 무엇인가: 비평으로서의 에세이영화 제언”에 대한 제언

본고는 밤비의 논고에 대한 비평이다. 나는 먼저 앞선 나의 글들에서도 제안된 바 있는, 비평에 관한 나의 이해를 제공한 뒤, 나의 비평 개념으로부터 밤비의 비평에 관한 관점을 고찰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른바 ‘에세이영화’라는 것이 그 자체로 대안적 비평의 중핵이 된다기보다는, 여전히 ‘자전적 서사’가 그 중심에 있으며, 밤비의 비평론의 방향이 이 중심을 향해야 함을 밝힐 것이다.

맥도웰과 브랜덤의 개인주의 논쟁

맥도웰과 브랜덤은 경험주의 논제에서 경험적 지식의 획득을 성공적으로 설명하려는, 동일한 목표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두 철학자가 각자의 인식론을 전개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그 차이는 관찰 보고observational report를 정당화하는 우선적인 권리가 언어 공동체에 있느냐, 혹은 주체 개인에게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는 단순히 개념의 명료화와 같은 기본적인 작업으로는 판가름날 수 없는 근본적인 철학적 견해의 차이다.

woman on a boat holding gas lantern

진리란 단지 우리 안에 있는가?

이 배는 단지 허상인가? 또는 이 배는 단지 역사적인 어떤 것만을 제공하는가? 즉, 우리가 진리를 판별하는 이 체계는 허상에 불과하며, 상대적이고 역사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틀에 불과한가? 이는 그런데 ‘인식적 규범성’이라는 생각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괴상하다. 어차피 우리가 그 자체로 참인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이 배를 뭐하러 타고 있으며 그 배를 수리할 이유는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뭔가 하나의 배가 다른 배보다 더 탐구를 위해 쓸모있기에 이 배를 타고, 또 이 배보다 더 쓸모있는 배를 알게 되면 그 배를 타는 것 아닌가?

열정, 세계, 삶

‘열정에 대한 열정’을 미심쩍게 보려는 우리의 경향성은 잘못된 이분법의 산물에 불과하다. 열정에 대한 열정이 구축한 ‘열정의 의의’는, 열정에로의 길을 닦는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 우리는 실재에의 열정과 조우한다. 우리는 이 자연스러운 그림을 수용한 채 우리가 하고 있는, 또한 할 수 있는 작업들을 그대로 해 나갈 수 있다.

(나에게) 영화 비평이란 무엇인가: 비평으로서의 에세이영화 제언

비평은 원래부터 ‘작품’과 비평가 ‘한 개인’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쨌거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이뤄지는 ‘사적인 만남’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가진 절대적인 특수성과 연결되는 지점이다(영화는 언제나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개별적인 인물과 관계한다). 비평이 만약 작품에만 종속적이기를 멈추고 비평가에게도 권리를 내어준다면, 작품과 비평가는 비평에서 만나 새로운 창작으로 나아갈 것이다. 비평가가 작품으로부터 파생된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에게 흘려보낸다. 이것은 현대 영화가 나아가고 있는 진행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사막을 걷는 자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아만자』와 서사의 치료

장례식 후 당신의 서랍에서 가져온 체크무늬 손수건을 오랜만에 꺼냈다. 이제 이 손수건에 당신의 살냄새는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나는 당신의 냄새를 기억한다. 아카시아 껌과 도마도 건너 당신의 미소도 기억한다. 당신이 외롭지 않도록 당신과 더 많은 대화를 할걸. 당신은 내 기억 속에 영원할 것이라고,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은 누군가와 계속해서 나눌 것이라고 미리 말할걸. 하지만 할아버지, 당신이 그걸 지금은 알 수 없을 테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이 나의 숲에 있단 것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며 기억할 것이다. 당신과 내가 접힌 기억들을 치료할 것이다.